"이제 불을 지르시오" "스님,이러시면 어떡합니까?" "나야 죽으면 어차피 다비에 붙여질 몸이니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불을 지르시오" 선우휘의 소설 '상원사'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법당에서 한암 스님(1876~1951)과 사찰 소각명령을 받은 국군 장교 사이의 대화다. 결국 국군 장교는 법당 문짝만 떼어내 소각하는 시늉만 하고 돌아갔고,상원사는 소실(燒失)의 위기를 넘겼다. 월정사에서 비포장길을 9km가량 달려서야 닿는 상원사 청량(淸凉)선원.한암 스님이 목숨을 걸고 지키지 않았더라면 잿더미가 됐을 뻔했던 신라 고찰이다. 산 중턱의 언덕을 깎아 절을 세운 이 곳엔 그래서 '오대산 도인'으로 불렸던 한암 스님을 비롯한 역대 선지식들의 기상과 정신이 면면히 흐른다.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경허 스님을 비롯해 수월 운봉 동산 등이 이곳에서 수행했다. 특히 1926년 서울 봉은사 조실로 있던 한암 스님이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으리라"며 상원사에 온 뒤로는 탄허 석주 효봉 서옹 고암 월하 지월 고송 범룡 스님 등 내로라하는 선지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수행 공간이라곤 법당인 문수전과 조그만 전각 몇 채가 전부였고 감자밥으로 끼니를 떼웠지만 안거 때마다 40∼50명,많을 땐 80여명이 정진했다고 한다. '북방제일선원'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지난 83년 소임자의 무성의와 열악한 살림살이 등으로 인해 문을 닫았던 청량선원이 다시 선객들을 받아들인 것은 지난 92년.정념 스님(월정사 주지)이 주지로 부임하면서다. 13년 동안 상원사 주지를 맡았던 정념 스님은 "선원 문을 다시 열 땐 어려웠지만 지금은 북방제일선원으로서의 위상을 되찾았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이곳엔 안거 때마다 수좌들이 몰려든다. 이곳에서 3년간 정진했다는 한주(閑住) 동덕(同德) 스님은 "전국의 선원 가운데 방부(입방신청)를 들이기 가장 어려운 곳이 청량선원"이라며 "지금은 전화로 미리 예약하지만 선착순으로 받던 예전에는 해제 전날 다른 선방에서 택시를 타고 달려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전한다. 법당인 문수전에서 더부살이하던 선원이 2002년 문수전 오른편에 1백50평 규모의 새 건물을 지어 독립한 뒤로는 수행 여건이 더욱 나아졌다. 높은 산중에 있어서 여름에도 청량할 뿐만 아니라 땅의 기운도 더없이 좋다고 경험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가깝다는 것도 장점이다. 동덕 스님은 "보궁을 등에 업고 정진하니 도가 저절로 닦이는 것 같다"고 했다. 수좌들의 정진 열기로 가득하던 청량선원도 지금은 해제철이라 한적하다. 남아있는 수좌들이 각자 처소에서 수행하기 때문이다. 동덕 스님의 배려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선원 문턱을 넘어서자 정적뿐이다. 선방 댓돌에 놓인 신발 한짝이 인기척을 대신한다. 마침 그 신발의 주인마저 포행(다리를 풀기 위한 산책)에 나서자 선방은 그야말로 무인지경이다. 동덕 스님을 따라 들어서자 왼쪽 벽 위의 용상방(龍象榜)이 하안거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용상방이란 안거에 참여한 수좌들의 역할 분담표다. 수좌들의 공부를 지도하는 조실과 회주(會主),수행 경력과 공부의 경지가 높은 선덕(禪德),선방내 규율과 기강을 세우는 입승(立繩),난방을 담당하는 화대(火臺),차와 과일을 담당하는 다각(茶角)….선방에서 누구도 소임 없이 지내지는 않는다고 한다. 새벽 3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10시간 이상 정진하는 꽉 짜인 생활.그러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것이 선원의 풍경이다. 그래서일까. 청량선원 선원장이자 상원사 주지인 나우(懶牛) 스님은 "공부란 게 별거 있습니까. 그냥 지낼 뿐이지요"라며 말을 아낀다. "수행을 너무 신비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생에서 잠시 쉬어가는 게 수행이지요. 생각을 놓고 쉼으로써 지나온 삶과 지금의 위치,앞으로 나아갈 방향 등을 보게 됩니다. 깨달음은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것처럼 어느날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요,확철대오란 안 보이던 것이 갑자기 보이는 게 아닙니다." 말은 이렇게 쉽게 하지만 사실 나우 스님은 20년 가량을 선방에서 보낸 정통 수좌다. 지리산 칠불암에서 3년 동안 동구불출(洞口不出)하며 정진했고 이곳 청량선원에서만 8년을 수행했다. 청량선원에서 나와 오대산에서 가장 높은 수행처인 북대(北臺)와 너와집으로 지은 수행처인 서대(西臺)를 순례한다. 북대와 서대는 20명이 수행하는 청량선원과 더불어 오대산의 중요한 수행처소다. 안거 때면 북대엔 5명,서대엔 1명이 공부에 동참한다. 북대와 서대를 거쳐 비구니 선원인 지장암 기린선원에 이르자 다시 월정사 근처다. 일주문으로 향하는 숲길,오대산의 기상처럼 쭉쭉 뻗은 전나무들의 몸짓이 힘차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