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산 < 소설가ㆍ대하소설 '삼한지' 작가 > 문무왕 김법민이 삼국통일을 이루도록 도와준 동맹국 당나라를 상대로 결전을 준비하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일은 탐관오리 척결이었다. 내사정과 외사정을 설치,운용하면서 부패공직자를 숙청하고 내관 외관을 통틀어 대대적인 물갈이를 단행했다. 자연히 말이 많고 반발 또한 거셌다. 그렇기도 한 것이,그때 문제가 된 대부분의 관리들은 백제와 고구려를 칠 때 공을 세운 유공자들이었다. 창칼을 들고 전장에 나가 목숨을 바쳐 싸웠는데 하찮은 허물로 쫓아낼 수 있느냐는 거였다. 그 시절 당나라와 싸운다는 건 오늘날로 치환하면 우방인 미국을 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당시의 당은 삼국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신라마저 집어 삼키려는 야욕에 불타고 있었다. 신라를 쳐서 한반도 전역을 속국으로 삼으려는 게 애당초 당의 전략이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문무왕으로선 어떤 어려움이 따른다 해도 당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무열왕 때부터 돈독한 혈맹인 탓에 조정엔 친당파 신하들이 많았다. 게다가 문무왕 자신의 아우는 물론 김유신을 비롯한 많은 고관 자식들이 당나라에 유학중이었다.전쟁이 나면 그들 모두가 당에 볼모로 잡힐 건 불을 보듯 뻔했다.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던 신하들은 일제히 전쟁불가를 외치며 왕의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그런 가운데 대대적인 공직자 숙청까지 단행하자 이에 반발한 장수와 신하들은 벼슬을 던지고 물러나거나 역모를 꾀하기도 했다. 그 위기를 40대의 젊은 군주 문무왕은 어떻게 헤쳐 나왔을까. 그것은 바로 이 땅의 백성 모두를 끌어안는 대동화합 정책의 구현이었다. 백제를 칠 때 지금의 국방장관직을 역임했던 명장 김진주가 몇년 뒤 임지에서 게으름을 피운다는 이유만으로 단칼에 처형할 만큼 엄격했던 문무왕이었지만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자애로운 군주였다. 그는 당의 노골적 협박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모조리 자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였다. 능력 있는 자에겐 벼슬도 주었다. 과거에 자신을 향해 창칼을 겨누었던 전죄 따위는 조금도 문제삼지 않았다. 삼한을 일가(一家)로 아우르려면 우선 삼한의 백성들이 하나가 돼야 한다는 게 그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그 거룩한 대동화합의 정신 앞에서 삼국이 투쟁하던 시절의 허물 같은 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다. 시대를 개척한 군주들은 대개 그랬다. 거시적 안목으로 장래의 뚜렷한 목표를 설정하고,한번 목표가 정해지면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반대했던 자는 물론이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정적(政敵)까지 용서해 심복으로 삼은 왕들도 한둘이 아니다. 물론 그런 인물들은 대부분 성공한 군주로 그 명성이 지금까지 자자하다. 당인 관리들의 학정에 못이긴 고구려 왕자 안승이 유민들을 이끌고 내려와 도움을 청했을 때도 문무왕은 흔쾌히 국토의 한쪽을 내주었다.연개소문의 아우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일로 노발대발한 당나라에선 당장 군사를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적어도 문무왕에겐 신라도 없고 고구려 백제도 없었다. 삼한의 강역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품안의 백성일 뿐이었다. 국력의 절대 열세를 극복하고 거대 강국 당을 상대로 벌인 나당 7년전쟁에서 마침내 신라가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그것이다. 안으로 부패한 관리를 솎아내고 밖으로 민심을 하나로 결집하는 것, 군주가 그 불변의 진리를 현실로 구현시킬 때 나라는 강국이 되고 시절은 태평해지며 백성들은 행복해한다. 긴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대한민국은 국호를 정하고 나라를 세운지 불과 50년 남짓한 신생국이다. 50이면 젊은 시절의 숱한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성숙한 기량으로 더 나은 성과를 위해 한창 분발할 나이다. 그런데 쉰살 남짓한 사람이 자꾸 옛일만 돌아보고 과거의 언저리만 배회한다면 얼마나 볼썽사나울 것인가.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나라 하나가 망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의 일임을 깨닫게 된다. 시급히 만들거나 뜯어고쳐야 할 국가시스템이 아직도 한둘이 아닌데,정작 할 일은 밀어둔 채 있지도 않은 허상(虛像)들만 만들고 대립과 분열을 조장하는 듯한 세태를 보면서 갈수록 착잡한 심정에 휩싸이는 것은 단지 나만의 기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