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견 대한펄프 사장kee@dhpulp.co.kr > 서울 시내 중심도로 중엔 우리 역사에서 유구히 기억돼야 할 위인의 이름을 딴 도로가 있다. 세종대왕을 기린 세종로,고구려 때 살수대첩의 위업을 세운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붙인 을지로,퇴계 이황 선생 이름을 딴 퇴계로가 그것이다. 출퇴근할 때 매일 퇴계로를 지나친다. 그런데 그렇게 자주 지나다니는 데도 위인들 생각을 별로 떠올린 적이 없는 것 같다. 일상에서 그냥 도로 이름으로 인식되고 있다. 요즘처럼 바쁜 생활을 하다 보면 정신적 양식의 굶주림에 별로 배고파하지 않는다. 사색의 사유를 누릴 여유를 못 찾는 것이다. 길 이름을 지을 때는 위인들의 사상과 철학을 만인들이 자주 되새겨 보라는 뜻일 텐데 무심히 지나고 있다. 퇴계 선생은 1천원짜리 지폐 모델로도 자주 만난다.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 선생은 1501년 연산군 7년에 가난한 진사 집안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명종 때 안동에 도산서원을 세워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 아주 바르고,참되고,양심있는 인재를 많이 길러내신 걸로 알고 있다. 선생의 학문사상과 애국심을 존경한 명종은 퇴계 선생이 보고 싶어 화가를 시켜 선생의 초상을 그려오도록 해 그리움을 대신했다는 일화도 전해오고 있다. 훗날 정조도 선생을 흠모해 선생을 기념한 국가고시인 '도산별시'를 마련해 지방 인재들의 사기를 높여준 적도 있다. 명종 때 영의정 권철이 선생을 만나러 갔을 때의 일화도 유명하다. 한 나라의 재상이 대학자를 만나 학문을 토론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식사 때 문제가 생겼다. 상에 올라온 차림이 꽁보리밥에 나물 무친 것과 콩나물국 한가지로 진수성찬만 들던 영의정은 도저히 몇 술 뜨지 못했다. 몇 끼니나 계속됐단다. 식사 불편을 못 참고 선생 댁을 떠나려 할 때 선생은 예를 갖추어 한 말씀 올렸다. "백성들이 먹는 음식은 꽁보리밥에 된장이 고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감께서는 그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제대로 잡수시지 못하는 것을 보고,저는 이 나라의 장래가 은근히 걱정스럽습니다"라고 말한 뒤 "무릇 정치의 요체는 나라가 백성과 즐거움,고통을 함께함에 있사온데 관과 민의 생활이 그처럼 동떨어져 있으면 어느 백성이 관의 행정에 열심히 따르겠나이까?" 했다. 영의정이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수그렸단다. 선생은 미래 성장동력의 핵심이 되는 인재육성으로 국가 경쟁력을 키웠다. 청빈과 위민사상은 관료의 복무정신에 사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퇴계로를 지날 때마다 선생을 떠올려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