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CEO 열전] (21) 이태용 대우인터내셔널 사장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91년3월,이태용 (주)대우 쿠알라룸프르 지사장은 홍순영(전 외교통상부 장관) 말레이시아 대사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이 지사장,골프 치지? 이번 주말에 나하고 라운딩 한번 해." "대사님,말씀은 고마운데 제가 나가기가 좀..." "아 이 사람아! 내가 놀자고 그러는 게 아니야.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어서 그래.말레이시아 정.재계에 마당발로 통하는 거물이니까 사귀어두면 비즈니스에 많은 도움이 많이 될 거야" 과연 그랬다.
홍 대사가 소개시켜 준 인물은 말레이시아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툰구 압둘라만의 아들로 기계 전자 보험업 등을 거느린 재계의 유력 인사였다.
압둘라만은 라운딩 도중 이 지사장에게 "한국으로부터 장갑차를 수입하고 싶다"는 제의를 하게 된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 국산 장갑차를 해외에 수출한 적이 한번도 없었거든요"
말레이시아 국방부 관계자들을 만나 본격적인 교섭에 들어갔다.
국방부 장관과 현역 장성들을 한국에 초빙해 대우중공업의 장갑차 공장과 잠수함 건조시설을 둘러보게 했다.
1백개가 넘는 말레이시아의 '별'들이 대우가 운영하던 방위산업체를 다녀갔다.
대우는 이 프로젝트를 따기 위해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대우중공업 오영일 상무와 안인 이사를 교섭 파트너로 내세워 총력전을 펼쳤다.
94년 1월 선적이 시작된 수륙양용 장갑차는 총 1백11대가 팔렸다.
1억4천만달러에 달하는 규모이다.
이태용(李泰鎔·58) 대우인터내셔널 사장은 지난 32년간의 직장 생활 중 이 시기를 가장 보람있었던 순간으로 꼽는다.
홍순영씨는 "사람(이태용 사장)이 워낙 부지런하고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라 눈여겨보고 있었다"며 "한번 맺은 인연을 놓치지 않고 기어이 일을 성사시키는 것을 보고 사람을 소개시켜준 나로서도 기분이 무척 좋았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매사에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사람이다.
골프를 치더라도 바람 많이 부는 날을 좋아한다.
스스로 "서두르고 조급한 성격이 단점"이라고 얘기할 정도다.
그런 이 사장이 첫 직장을 보수적인 직장의 대명사인 한국은행으로 선택한 것은 젊은 시절의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고등학교(보성고) 때는 최기선 전 인천시장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1등을 다투었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서울대 상대)생활은 그다지 편안하지 못했다.
4년 내내 과외교사를 하며 학비를 벌어야 했다.
신발이 없어 군화 목을 잘라 신고 다녔으며 흔한 다방 커피 한잔 사마시지도 못했다.
72년 3월 대학을 졸업하자 한국은행 무시험 입행 자격이 주어졌다.
졸업성적 5등 이내에 든 덕분이었다.
한은은 더할 나위없이 아늑한 직장이었다.
일반 직장의 평균을 웃도는 보수에 근무 여건도 괜찮았다.
게다가 금융 엘리트의 집결지라고 불리는 조사부에 배속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장은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틀이 꽉 짜여진 은행업무에 갑갑함을 느꼈다.
"당시 한은의 조사 업무는 경제정책 수립과 집행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지만 지나치게 과거 지향적이었습니다.
맨날 흘러간 통계치와 씨름하다보니 좀이 쑤시더군요."
그러던 차에 ㈜대우에 다니던 동창들을 만나 종합상사의 생활상을 듣게 된다.
선적에서 수금까지 모든 업무를 혼자 처리하고 해외에 나가 바이어도 직접 만나는 생활이 너무 부러웠다.
결국 76년 10월 한은을 나와 대우그룹 경력사원 모집에 응시하게 된다.
대우그룹 기획조정실의 '인수 합병(M&A)팀'에 배치됐다.
대우는 그해 대우중공업 인수를 마무리 짓고 새한자동차 인수에 나서는 참이었다.
"얼마나 재미있던지 시간 가는줄 몰랐어요. 만나는 사람들도 다양하고 일도 역동적이었어요.
왜 이제서야 회사를 옮겼나 후회가 될 정도였으니까요."
그는 78년 ㈜대우로 옮겨 자동차수출 과장을 맡았다.
'새마을 픽업'과 '제미니'를 유럽 중동 아프리카 등 세계 전역에 내다 팔았다.
한번 출장을 떠나면 한달이 예사였지만 신나는 나날이었다.
그리스에 2천대,수단엔 3천대를 한꺼번에 파는 수완도 발휘했다.
최고의 전성기는 81년 부장으로 승진해 호주의 시드니 지사장으로 나가 철강과 화학제품을 팔 때다.
뉴질랜드와 남태평양의 조그마한 섬나라들이 모두 업무 권역이었다.
당시 포항제철의 철강 물량은 다른 종합상사가 맡았기 때문에 그는 일신제강 물량을 수출했지만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실적은 동종업계 호주 사업부를 압도했다.
사탕수수 재배가 주력 산업인 피지에선 현지 정부의 비료구매 입찰에서 일본 종합상사들을 연거푸 네차례나 누르고 수출물량을 확보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물론 이 사장에게도 쓰라린 경험은 있었다.
호주의 광업회사인 BHP의 신조 발주에서 대우조선을 대행해 입찰에 나섰지만 5년동안 한 건도 수주를 하지 못한 것.입찰에 떨어진 날은 분해서 밤잠을 설쳤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BHP 건만 제외하면 손대는 일마다 믿기 어려울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자신감으로 충만해 무엇이든 시도하려고 했던 시절이에요"
86년 귀국해 철강 2부장을 맡았다.
그가 맡은 품목은 덩치만 크고 수익은 적은 철근으로 만년 적자사업이었다.
그는 87,88년 중국에 사상 최대규모의 철근 수출을 성사시켰다.
사업부는 금세 흑자로 전환했다.
92년 콸라룸푸르 지사장(이사)-96년 철강사업 본부장(상무)을 거쳐 98년 상품영업 부문장(전무)으로 올라섰다.
그해 1백60억달러의 수출을 지휘해 종합상사로는 최고의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대우의 왕성한 영업력은 그 때가 절정이었다.
97년말 불어닥친 외환위기에 대우의 '세계 경영'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99년말 대우가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순간,제 삶의 뿌리도 흔들렸습니다. 무역전선에서 다들 열심히 일해 일군 기업이었는데 참 허망하게 무너지더군요."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다니는 소망교회의 이발기술 교육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이발기술을 배워 양로원을 찾아다니며 자원봉사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뜻하지 않게 서둘러 찾아온 은퇴였지만 모든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했지요."
하지만 그 순간 실낱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99년 12월 대우자동차에서 책상 정리를 하던 그에게 ㈜대우에서 분할된 ㈜대우 무역부문(나중에 대우인터내셔널로 사명 변경)의 사장을 맡아달라는 채권단의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조금 망설였어요. 옛날 대우 사람들이 모두 죄인 취급받던 시절이라서요. 하지만 제 청춘을 바친 회사를 제 힘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은 소망도 있었어요."
이 사장은 지난해말 대우인터내셔널을 워크아웃에서 졸업시키며 4년만에 완전 정상화시키는데 성공했다.
견실한 구조조정과 수익위주의 경영을 펼치면서도 무역전문가 집단의 이탈을 최소화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그는 특히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감안해 가스나 원유 같은 자원개발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경제성이 입증된 베트남의 11-2 광구,미얀마의 A-1과 A-3 광구의 가스 채굴권도 잇따라 따내 상당한 배당수익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이 사장은 한국은행에 안주할 수 있던 삶을 박차고 나와 개발경제시대의 풍운아였던 ㈜대우에 과감하게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람처럼 세계시장을 누비며 자신의 소질과 잠재력을 발휘했다.
비록 과거의 대우는 망했지만 상사맨들의 진취적인 기상과 불꽃처럼 일렁이던 열정을 아직 잊지 않고 있다.
"다시 태어나더라도 상사맨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종합상사의 역할은 국가경제에 여전히 긴요한 것이고 사업영역도 무궁무진합니다."
조일훈 기자 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