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의 전성기를 구가한 르네상스는 한편으로 성(性)으로 부터의 해방기이기도 했다. 이런 사회분위기 탓에 매음이 성행했고 주로 정치적 경제적으로 몰락한 여성들이 창녀로 전락했다. 당시 유럽의 웬만한 대도시에는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여성들이 수만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매춘은 주요 생계수단이었던 것 같다. 천박했던 매춘부의 이미지는 19세기 춘희(椿姬)가 등장하면서 바꿔지긴 했다. 춘희는 교양과 사교성을 바탕으로 정치계와 유행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는 종전과 다르지 않았다. 사실 매음의 역사는 기원 훨씬 이전으로 거스러 올라간다. 고대 인도에서는 사원매춘이라 해서 무희(舞姬)가 사원의 참배자들에게 돈을 받고 몸을 맡겼는데 고대 이집트 페르시아 등지에서도 이러한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종교적으로 엄격했던 중세에도 사창은 금지됐으나,공창은 세금을 내는 대신 보호를 받을 만큼 사회의 필요악으로 존재했었다. 우리의 경우는 조선시대 주막집의 주모나 작부들이 나그네와 상인들을 상대로 매음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한말(韓末)에는 가무나 기악 등의 예능을 갖춘 기생들이 주연이 끝난 뒤 매음을 했다. 매음이 성행하게 된 것은 해방 후 미군기지 주변을 비롯 기차역을 중심으로 사창가가 형성되면서부터다. 숱한 범죄의 온상이 되다시피한 사창가를 정비하기 위해 당국은 그동안 법과 행정력을 동원해 단속을 벌였지만 그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이제 정부가 단호한 의지로 나섰다. '성매매방지법'이 오늘부터 발효되는 것을 계기로 불법적인 매음을 근절하면서 잘못된 '성문화'를 바로잡아 가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매춘녀 성매매중개자 행위자 모두가 처벌대상인데,이 법의 성공여부는 여성을 상품화시켜 왔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남성들의 자세에 달렸다. 한가지 걱정은 수십만명에 달하는 매춘산업 종사자들이 어떤 직업을 찾아 나설까 하는 점인데 여기에 대한 대비책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는지 꼼꼼히 챙겨봐야 할 것 같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