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英先 < 한국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재정을 잘 관리해온 모범적 국가로 꼽힌다. 재정건전성을 유지해온 덕분에 외환위기 때 정부는 일시적인 재정적자를 감수하면서 적극적으로 금융구조조정과 실업 및 빈곤대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예산회계제도는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지나치게 많은 특별회계와 기금이다. 1개의 일반회계와 22개의 특별회계,그리고 57개의 기금 등 총 80개의 '돈주머니'로 이뤄진 복잡한 예산구조는 재정운영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저해하는 것으로 지적된다. 우리나라 거의 대부분의 재정학자들은 특별회계 및 기금의 대폭 정비를 정부에 촉구해 왔으며 국제통화기금(IMF) 및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의 국제기구들도 이에 동조했다. 이런 요구에 맞춰 대통령 직속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및 기획예산처 '기금존치평가단'은 특별회계 및 기금 수를 47개로 줄이는 방안을 마련,최근 한 공청회를 통해 발표했다. 공청회에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제시된 정비방안에 대해 기본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비판적인 시각이 없지 않았다. 이러한 비판 가운데 하나는 특별회계 및 기금의 수가 많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 연방정부의 경우 99년 기준 회계 및 기금 수가 일반회계 1개,특별회계 2백46개,기금 2백24개 등 4백71개에 달한다는 점이 지적됐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우리나라는 미국에 비해 특별회계 및 기금의 수가 훨씬 적으므로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크지 않다는 주장으로 연결될 수 없다. 미국 회계감사원(GAO)이 추산한 바에 의하면 특별회계 및 기금의 지출은 99년의 경우 약 1조달러로서 전체 연방정부 지출의 55%에 달한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연금·실업보험 등 사회보장적 성격의 지출이다. 이런 성격의 지출은 특별회계나 기금을 통해 별도로 관리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들을 제외하면 미국에서 특별회계 및 기금의 지출비중은 12%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특별회계 및 기금의 지출이 전체 중앙정부 지출의 약 50%에 달해 미국과 비슷한 수준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사회보장적 성격의 지출은 일부에 불과하며 이들을 제외하더라도 특별회계 및 기금의 지출비중은 40%를 넘어서고 있다. 따라서 특별회계 및 기금의 수는 미국이 훨씬 많더라도 그 비중은 우리나라가 훨씬 큰 것이다. 이로 인해 예산체계의 분절화(分切化)가 보다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으며 대폭적으로 특별회계 및 기금을 정비하는 방안이 마련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많은 특별회계 및 기금은 목적세나 부담금을 부과해 특별한 목적의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설치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사업을 추진할 필요가 낮아진 후에도 목적세와 부담금이 계속 부과되는 현상이 종종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자주 거론되는 것이 교통세와 농어촌특별세다. 이들은 당초 한시적인 목적세로 도입됐으나 존치기간이 계속 연장되고 있다. 특별회계 및 기금 정비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불필요한 목적세와 부담금을 폐지하거나 일반재원으로 전환해 보다 광범위한 국가사업에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특별회계 및 기금 정비와 더불어 반드시 추진돼야 할 과제는 프로그램 예산제도의 도입이다. 현재와 같이 회계 및 기금에 따라 예산을 분류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담당조직과 사업에 따라 체계적으로 예산을 분류해 과목구조를 설정해야 한다. 프로그램 예산제도의 구체적인 도입방안은 현재 기획예산처의 '디지털예산회계기획단'에서 마련하고 있다. 물론 공청회에서 제시된 정비방안이 최선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근본목적과 기본방향을 부인하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보다 건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yskoh@kdi.re.kr ------------------------------------------------------ ◇이 글은 한경 9월22일자 박기백 조세연구원 연구위원의 시론 '기금·회계정비 방안의 오류'에 대한 반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