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자동차를 타고 서쪽으로 30분을 달리면 에스푸라는 작은 도시가 나온다. 자작나무 숲 사이로 난 한적한 4차선 도로를 달리다 만나는 이곳에 오타니에미 사이언스파크가 있다. 6∼7층 높이의 회색빛 연구동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이 곳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3백여 기업의 5천여명 연구인력이 일하는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적하고 조용했다. "북유럽 최대의 민간 인큐베이터 단지로 매년 80여개의 벤처기업을 배출한다. " 이곳에서 사업개발 자문역을 맡고 있는 투오마스 마이살라 씨의 설명을 듣고서야 그 명성에 짐작이 간다. "여기서 창업한 벤처기업이 평균 매년 50%씩 성장하고 창업후 2년 뒤까지 86%가 살아 남는다"는 말엔 더욱 그렇다. 이 단지는 대학 기업 연구소 등 산·학·연이 만나 첨단 기술 비즈니스라는 꽃을 피우는 핀란드의 대표적인 클러스터(산업단지)다. 핀란드엔 이런 클러스터가 19곳이나 있다. 모두 헬싱키 공대 등 유명 공과대학을 중심으로 기업과 연구소들이 모여 아이디어와 기술을 공유하고 상업화하는 산·학·연 협동의 장(場)이다. 기술 강국 핀란드 경쟁력의 산실이기도 하다. 핀란드에서 산·학·연 협동이 활발한 데에는 정부의 뒷받침이 결정적이다. 가진 것이라곤 사람 밖에 없는 핀란드는 국제 경쟁에서 살아 남는 길은 오직 기술경쟁력 뿐이라고 판단하고 일찌감치부터 연구개발(R&D)과 인력양성에 꾸준히 투자해온 것. 국가경쟁력이 세계 수위를 달리고 있는 유럽 강소국들은 정부가 R&D와 교육 등 경제의 '기초 체력'에 집중 투자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업 활동에 필수적인 고급 기술과 양질의 인력을 공급하는 토대를 정부가 제공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이 탄생했고,결과적으로 국가경쟁력이 강해진 것이다. 실제 유럽 강소국 정부의 R&D 투자는 세계 최고다. 핀란드는 지난 2002년 총 48억유로(약 7조원)를 R&D에 투자했다. GDP의 3.46%로 세계에서 가장 많다. 핀란드 정부는 90년대 초 경제위기 때도 오히려 R&D 투자를 늘렸다. 허리 띠를 졸라 매야 할 때 R&D예산을 늘리기 위해 노사가 복지예산을 줄이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정부는 공기업 민영화로 들어 온 돈을 R&D에 쏟아 부었다. 네덜란드 정부도 작년 9월 총리를 위원장으로 주요 대학 총·학장,필립스 등 주요 기업 대표 등 18명이 참여하는 '기술혁신 위원회'를 여여왕 칙령으로 만들 만큼 R&D에 '올인'하고 있다. 교육투자 역시 R&D 못지 않다. 좁은 국토에 대외 의존도가 높은 네덜란드는 생존을 위해선 잘 교육받은 인력이 필수적이란 걸 일찍부터 깨닫고 교육에 힘써왔다. 특히 외국어 교육은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시키기로 유명하다. TV프로그램도 절반이 영어로 진행되고 외국영화는 아예 더빙을 하지 않는다. 덕택에 국민중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전체의 77%,독일어와 프랑스어를 할 수 있는 사람도 각각 59%와 15%에 달한다. 국민들의 외국어 구사능력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뛰어나다. 1982년 바세나르협약을 탄생시켰던 네덜란드 루트 루버스 내각은 교육개혁도 단행,기업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을 키우는 데 교육의 초점을 맞췄다. "이공계 중심의 실전형 교육을 위해 1986년 3백개 중등 교육기관을 80개의 고등기술 교육기관으로 통폐합했다. 지금도 대학의 학과 정원은 국가 전체의 노동시장 상황과 국가의 인력 양성 수요에 맞춰 엄격하게 정해진다. "(한스 하우트데이크 네덜란드 경제부 전략연구국 부국장) 핀란드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전 과정의 학비를 국가에서 부담하는 건 물론 매달 2백59유로(약 37만원)를 생활비로 주기까지 한다. 때문에 교육비가 국민총생산(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2%에 달해 OECD 회원국중 최고다. 문맹률 0%,대졸이상 학력 보유자가 전체 국민의 13%에 이르는 핀란드의 높은 인적자원 경쟁력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건 아니다. 과감한 교육투자는 국민들의 높은 생산성으로 돌아온다. 지난 90년대 후반 연평균 국민경제생산성(한 나라의 불변 국내총생산을 취업자 수로 나눈 값)은 핀란드가 6만6천달러,네덜란드는 5만8천달러로 미국(6만1천달러) 일본(7만9천달러)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한국은 2만5천달러 수준이다. "업종별 산업정책이나 개별 기업 규제책을 버리고 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기술과 인력을 뒷받침하는 데 힘쓴 정부야말로 유럽 강소국들의 높은 경쟁력 비결중 하나다. "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발 코롬자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연구부문장의 말은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웅변해주고 있다. 에스푸(핀란드)·헤이그(네덜란드)=차병석 기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