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 지쳤는지,그이는 '일요일 만이라도 쉴 수 있는 직장으로 옮기고 싶다'며 밤새 침울한 얼굴이었다.내 딴에는 여러 말로 위로를 해보았지만 별 위안이 되지는 못한 것 같다.대문에 올라서서 출근하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뭔가를 꼴똘히 생각하는지 발걸음이 더뎠다.축쳐진 그의 어깨 위로 가량비가 내렸다.그가 안쓰러보였다." 이승한(李承漢.58) 삼성테스코 사장의 부인 엄정희(54)씨는 75년 9월2일자 일기에서 일에 치어있는 남편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있다. 두 사람은 결혼한지 8개월 밖에 되지않은 신혼부부였지만 남들처럼 깨가 쏟아지는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이 사장이 휴일도 없는 주야간 근무에 녹초가 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직책은 신세계 "슈퍼 스토아"(슈퍼마켓 사업부) 총무과장.유통업의 특성상 일요일이 있을 수없다. 평일에도 손님이 있는 시간까지는 문을 열어둬야 한다. 날마다 일일 정산을 마쳐야 퇴근할 수있고 특히 월말에는 숫자를 맞추느라 며칠씩 밤을 새워야한다. "정말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더라구요." 이 사장은 천성적으로 낙천적인 사람이다. 경북 칠곡군 왜관 출신인 그는 일곱형제 중 막내에다,부친이 정미소를 운영해 가정형편도 넉넉한 편이었다. 유복했던만큼 학창시절은 자유분방했다. 고등학교(대구 계성고)시절 수업시간은 무협지 읽는 시간이었다. 방과 후에는 운동에 미쳐 지냈다. 씨름에서부터 유도(공인 2단) 농구 배구 복싱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운동을 다했다. 3학년땐 씨름부 주장을 맡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쌓은 실력을 바탕으로 지금도 짬짬이 샌드백을 두드릴만큼 그는 운동을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비상한 기억력을 앞세워 성적은 늘 상위권을 유지했다. 대학진학은 순조롭지 못했다. 65년 고려대 상대,66년 서울대 상대 시험에 잇따라 낙방한 뒤 당시 후기대학이었던 영남대(경영학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낙천적인 성격 덕분에 그는 낙담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대학시절엔 삼성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았으며 그게 인연이 되어 졸업 후 삼성에 입사하게 된다. "건방진 얘기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삼성에 들어가면서 사장을 목표로 했습니다. 저만 잘하면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70년초 처음 배치받은 곳은 제일모직 판매부의 모직물과.처음 6개월은 주산과 복사 같은 허드렛일로 일관했다. "'취권'이라는 영화 아시죠? 무술을 배우겠다고 찾아간 제자에게 스승이 무술은 가르쳐주지 않고 물 길어오기 같은 심부름만 시키잖아요. 꼭 그런 식이었어요." 71년 기획실로 옮겨 그는 국내 최초의 기성복 개발 업무를 맡게 된다. 모직물 시장의 경쟁이 격화되자 아예 기성복 시장을 새로 창출하겠다는 회사의 전략에 따른 것이다. 봉제공장을 만들고 난 뒤 73년 'SS패션'의 전신인 신설 자회사 '제일복장'으로 옮겨 사업기획-생산-판매 업무를 총괄하는 주무사원이 됐다. 그는 여기에서 탁월한 아이디어와 기획력을 선보였다. 일도 독하게 했다. 어떤 업무 지시를 받아도 하루를 넘기는 법이 없었다. 당시 이 사장의 상사였던 유한섭 전 신세계백화점 회장(67)의 얘기이다. "전날 지시한 업무가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이뤄졌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이승한이는 물건이었어요." 74년 이 사장은 그룹 비서실 감사팀으로 갑자기 전보된다. 제일복장 주무사원 시절 감사를 받을 때 명쾌한 설명으로 뚜렷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는 75년7월 4년6개월만에 과장으로 승진해 과장급 기준으로 삼성의 최단기 승진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랬던 이 사장은 신세계를 거쳐 76년 평생 직장이 된 물산에 자리를 잡게 된다. 당시 수출드라이브로 사업이 급팽창하던 물산은 내부 관리의 중요성을 인식해 경험있는 감사과장을 물색하고 있었고 이 사장은 적임자로 발탁됐다. 감사과장은 사장실장(비서실장)을 겸직하는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5년간의 런던지점장 생활을 거쳐 입사 14년만인 84년 임원이 되자 그의 기량은 만개했다. 해외사업업무를 총괄하면서 국내 종합상사로는 처음으로 일본과 대만에서 공사를 수주했다. 국내 건설업체들의 중동 진출이 붐을 이루던 87~88년엔 거꾸로 중동에서 철수하는 전략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많은 업체들이 공사 미수금으로 홍역을 앓고있던 시절 그는 공사대금을 현금 대신 원유로 거둬들이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는 중동 정부의 실력자들을 런던에 초대했다. '공작 거점'은 런던 중심가 스왈로우 거리에 자리잡고 있던 성인 바 '찰리 채플린'."회교도들인지라 처음에는 '소프트 드링크'만 주문하더라고요. 저를 경계하는 눈치도 보였고요. 그러나 그들 역시 사람이었습니다. 술이 한잔 두잔 들어가자 독한 위스키도 마다않고 마시더군요. 그렇게 중동의 실력자들과 친분을 쌓았습니다." 이 사장과 격의없이 친해진 그들은 질 좋은 원유로 대금을 결제해줬고 이 사장은 이를 런던시장에서 좋은 가격에 팔았다. 당시 이런 식으로 받은 대금이 3억달러를 훨씬 넘었다. "결과적으로 삼성물산은 중동에 진출해있던 건설업체 중 가장 적은 손실을 내고 철수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 갑자기 큰 시련이 닥쳐왔다. 87년 여름,아홉살 먹은 맏아들 성주군이 학교에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부인과 함께 밤마다 베갯잇을 적시며 울었다. 88년 봄엔 부인이 위암 판정을 받았다. 졸지에 어린 아들을 잃은 슬픔이 가슴에 못이 박힌 탓이었다. "유난히 해외출장이 많았을 때입니다. 병든 아내와 어린 딸 현주를 놔두고 출장길에 오를 땐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팠어요. 공항 면세점 선물가게를 들를 때면 아들놈 생각이 나 한동안 멍하게 서있곤 했어요." 하지만 고난은 고난이고 일은 일이었다. 그는 93년 비서실로 불려가 SOC추진 태스크포스 팀장을 맡았다. 이어 94년엔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신경영 추진팀장(전무)으로 발탁됐다. 이 사장은 이듬해 97년12월 유통부문 사장을 맡아 입사이래 간직해온 꿈을 이뤘다. 이 회장은 그를 사장으로 임명하면서 "유통을 물산의 차세대 주력으로 키워달라"고 당부했다. "그날 집에 돌아오니 방안이 온통 꽃밭이더군요. 하지만 막상 사장이 되고 보니 기쁨은 잠시였고 시간이 갈수록 어깨가 무거워옴을 느꼈습니다." 실제 IMF사태로 경제가 쑥밭이 된 시기였다. 그룹 차원의 구조조정 전략에 따라 유통사업부는 외자유치를 추진키로 했다. 몇차례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파트너로 영국계 테스코가 최종 결정됐다. 이 사장은 삼성을 떠나는 것이 조금 섭섭했지만 테스코가 자신에게 경영권을 일임한데다 유통분야의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판단해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CEO를 맡은지 올해 벌써 6년째 접어들고 있다. 그는 지방에 거점을 먼저 확보한 뒤 수도권으로 올라오는 독특한 전략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출범 당시 연간 3천억원 수준에 불과하던 매출은 지난해 업계 2위 수준인 3조3천억원까지 불어났다. 이 사장은 인생을 무술 수련에 비유한다. 고된 기초 훈련을 견딜 수 있는 강한 정신력과 의지력을 가져야 전문인의 길도 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직장생활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고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잔잔한 파도가 능란한 뱃사공을 만들지 못하는 원리를 깨달아야 해요." 이 사장은 크고 작은 인생의 고비에서도 일 중심의 생활은 끝내 놓치지 않았다. 아들을 잃고 가족들이 깊은 슬픔에 잠겨 있을 때도 그는 런던으로 날아가 중동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떠들고 웃었다. 당시 이 사장은 해외 최대 출장기록(1년에 1백48일)으로 '삼성 기네스북'에 올랐다. 조일훈 기자 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