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단은 어둠 속에 싸여 있었다. 몇몇 대형 공장 건물들에서 간간히 불빛이 새 나오고 있지만 대로변을 벗어나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서자 지나가는 사람도,차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무서운 생각마저 든다. 경기침체가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던 지난해 이맘때,중소기업들의 야간조업 풍경을 취재하기 위해 반월공단을 찾은 것은 오후 9시를 조금 넘긴 시각. 수습 기자 딱지가 이제 막 떨어졌지만 스스로도 아직 기자 같지 않은 신출내기 시절이었다. (신출내기 시절?! 내가 벌써 이런 말 해도 되나?) 무작정 공단 이곳저곳을 헤메다 비교적 규모가 큰 공장 앞을 기웃거려 본다. 굳게 닫힌 철제문 너머로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온다. "저...실례합니다만 오늘 야간조업 하시는 분들은 안 계신가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무슨 일이요?" "경기가 나빠서 그런가요? 이 시간에 사람이 없네요... 참,이 근처에선 회식할 때 주로 어디들 가세요? 중앙역으로 가시나요?" 없는 미소까지 지어보며 계속 질문을 던진다. 공단 근처 유흥가의 밤 풍경이라도 취재해볼 요량으로... 갑자기 한 아저씨가 퉁명스럽게 말을 던진다. "아가씨,지금은 직원들도 없으니까 명함 돌리러 나왔거든 다른 데 가봐" 나는 그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나보고 명함을 달라는 얘긴가. 그러나 다음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야밤에 공단지대를 서성거리는 젊은 아가씨라... 마침 불이 켜진 조그만 공장이 눈에 띄었다. 기계공구를 제조하는 10평 남짓한 영세한 공장 내부에는 사장이라는 사람이 혼자 작업을 하고 있다. 시린 쇠 냄새가 기름내와 함께 물컹 코끝에 와 닿는다. 이번에는 아예 처음부터 '한국경제신문 기자'라며 말을 붙여본다. 그런데 이 사장님,커피를 한 잔 내놓으며 무턱대고 하소연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먹고 살기가 힘들어 이번 주까지 공장을 돌리고 사업을 접으려고 한다"며 한숨을 내쉰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경제기자가 되어갔다. "네 문혜정 기잔데요" "거기 기자 좀 바꿔주시오" "제가 기잔데요. 말씀하시죠" "아니 남자 기자 말이야!" 사람은 사소한 데 목숨을 잘 건다고 이런 자잘한 데서 밀리면 나의 기자 생활도 끝장이라는 각오로 오늘도 나는 취재원들과 어깨를 부딪힌다. 그렇게 벌써 경제기자 2년이 후딱 지났지만 취재원들로부터 받은 명함을 쌓으면 천장에 닿을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직종에 취직한 대학 동기들 보다 훨씬 폭넓고 생생한 경제 현장의 경험들이 내속에 축적돼가고 있는 중이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연구실에서 밤잠을 설쳐 벌건 눈을 하고 있던 기술자 사장님도 있고,위험을 무릅쓴 투자로 해외시장까지 일궈낸 사업가도 있었고,채권자들에 둘러싸여 무표정한 얼굴로 천장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중소기업 사장님도 있다. 그 경영자들과 동고동락하던 영업 사원들과, 기술 만큼은 자신이 세계 최고라고 자부하는 기술자들과,또 그들의 가족들은 지금 이 어려운 경기침체의 시절을 어떻게 보내고들 있는지. 그들 경제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나라,이 대한민국이 경제 하나만큼은 똑부러지게 잘하는 나라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 나 문혜정은 당찬 경제기자가 되어볼 생각이다. (또 전화가 걸려왔군요. 이제 그만) "네 문혜정 기잡니다...글쎄 제게 말씀하시라니까요" 벤처중기부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