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링 산업은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우는 한국경제 성장의 역사와 발걸음을 함께 해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회간접자본과 대규모 산업설비 등 굵직굵직한 국가 인프라 건설의 현장에서 엔지니어링 분야는 핵심적인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화려한 성장의 모습만을 보여준 것은 물론 아니다. 해외 기업과의 기술수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몸살을 앓아왔다. 국내 업체간 제살 깎아먹기식 과당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도약과 정체의 갈림길에 선 한국 엔지니어링 산업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산업입국의 첨병 엔지니어링 산업은 해방후 관청의 하청을 받는 기술용역 업무로 시작됐다. 54년 서울 성수동에 건설된 하루 생산능력 10t 규모의 한미화학 황산공장이 국내 엔지니어링사업의 효시로 꼽힌다. 이 공장은 처음으로 국내 기술로 설계되고 건설됐다. 엔지니어링 산업은 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65년 대한건설기술용역협회 창립 당시 종합기술단 9개,설계 사무소 14개에 불과할 정도로 그 기반은 취약했다. 경부고속도로 경인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사업과 울산석유화학단지 여수석유화학단지 등 화학공업이 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성장 궤도에 올랐다. 70년대에 들어서는 화학 기계 등 다양한 분야 플랜트 수요가 급증하면서 국내 업체들이 외국 회사와의 합작 또는 하청방식으로 사업영역을 크게 넓혀나갔다. 엔지니어링 업계는 73년 기술용역육성법 제정과 함께 기술혁신을 위한 변화의 계기를 맞이했으며 그 이듬해 한국기술용역협회(엔지니어링진흥협회의 전신)가 창립되면서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73년에 63개에 머물렀던 기술용역 업체는 81년에 1백81개로 크게 증가했다. 80년대엔 아시안게임,올림픽개최 등과 관련한 각종 건설 사업과 정보통신 인프라 구축 사업 등으로 엔지니어링 산업이 급속 성장했다. 90년에는 엔지니어링 업계의 연간 수주실적이 1조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그후 영종도신공항 등 대규모 사회간접자본 사업과 산업설비 수출의 증가에 힘입어 성장을 거듭했으나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로 브레이크가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의 대외 신인도가 높아지고 국내경기가 되살아나면서 다시 성장세로 돌아섰다. ◆현주소 지난 2003년 말 기준으로 국내 엔지니어링 업체는 2천3백여개에 이르고 있다. 업종 별로는 건설 부문이 가장 많고 통신·정보처리 부문,기계 부문,전기·전자 부문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직원 규모 별로는 20인 이하가 68%로 가장 많으며 50∼2백명 미만이 23%,20∼50명 미만이 19%를 차지하고 있다. 엔지니어링 업체에 몸담고 있는 기술인력은 지난 2002년말 기준으로 4만2천9백90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기술사 기사 등 자격증을 보유한 인력은 2만2천6백31명이다. 지난 2002년의 수주 실적은 국내 4조7천2백35억원에다 해외 3천7백49억원을 합해 5조9백84억원을 기록했다. 이처럼 엔지니어링산업의 외형은 몰라보게 커졌지만 글로벌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많은 숙제를 안고 있다. 시스템 엔지니어링,설계감리 등 핵심기술의 수준은 아직도 선진국의 60%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장원락 기자 wr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