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가정식 백반 ‥ 이 견 <대한펄프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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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견 대한펄프 사장 kee@dhpulp.co.kr >
들판에 가을이 왔는지 볼겸 가족과 집을 나섰다. 한낮은 아직도 늦여름을 붙잡고 있다. 하지만 드문드문 산에는 가을 화장을 시작한 흔적이 역력하다.
가을 들녘의 풍요로움은 누구한테나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벼를 걷어 볕에 잘 말린 다음 찧어낸 햅쌀이 유난히 고울 때다.
어릴적 햅쌀로 밥을 지어 생 갈치에다 가을 무를 숭숭 썰어 넣고 국물이 자박할 만큼 달큰하게 끓여낸 다음 막 버무린 김치를 밥에 얹어 먹던 생각이 난다. 꿀맛의 행복에 빠져 정신을 못 차렸었다.
옛날에 즐겨 먹던 음식들이 밥상에서 슬슬 자취를 감추고 있다. 된장,고추장마저 공장에서 만든 걸 예사로 먹는 세상이다. 집에서 콩을 삶고 메주를 띄우는 것이 번거로워 편한 걸 찾게 된다.
식구도 단출해져 많이 만들지 못하는 것이 옛맛을 가까이 못하게 한다. 된장이 특유의 구수한 맛을 유지하며 식구들 건강을 챙겨 올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장을 담글 때 온 정성을 기울인 덕분이다.
장 담그는 날을 신경 써서 정하고 새끼를 꼬아 부정을 막는 금줄을 치는 등 어머니는 장 담그는 것을 집안 일 중 으뜸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만큼 맛있는 장을 담글 수 있었다.
된장과 같이 만들어진 우리네 간장은 어느 조미료도 흉내낼 수 없다. 양조 간장은 맛의 궁합을 못 맞출 때가 많다. 된장에 오래 담아 묵혀낸 콩잎이나 깻잎,장아찌의 풍미를 누가 흉내내겠는가.
찬물에 밥을 말아 간고등어 한 점에 밥술 뜰 때도 마찬가지다. 다섯가지 맛이라 하여 짜고 달고 시고 쓰고 매운 맛밖에 몰랐던 외국 사람들도 삭은 맛,곧 발효미라는 독특한 맛이 더해진 우리 김치에 반해 입맛을 다신다.
국도변에는 '가정식 백반''시골밥상'을 써 붙인 식당이 심심찮게 보인다. 마치 신종 메뉴처럼 눈에 낯설다. 우리가 평상시 먹던 것이 이색 메뉴가 된 셈이다. 각종 국적 불명의 퓨전 음식에 토종 맛이 별미로 변신했다.
어머니 손으로 무쳐진 나물은 '레시피'도 없지만 항상 맛있다. 식품위생법을 들이대지 않아도 식중독 한번 걸린 적이 없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정성이 깃들이면 손에서 아미노산과 항균제가 나온다던가. 배탈이 나도 어머니 약손이 쓰다듬으면 거짓말처럼 나았다.
외국에서 온 친구 부부가 외식을 한 뒤 부인이 식중독에 걸려 한 달 간 죽만 먹으며 고생했다. 냉면을 잘못 먹은 탓이다. 그 식당에 사후 항의했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위생 관련 온갖 법이 다 동원돼도 양심을 팔면 소용없다. 우리나라에서 잘 살려면 먹는 것을 잘 가려 먹어야 한다. 집에서 해준 밥이 바로 웰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