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지난 99년 마지막 유상증자 이후 벌써 5년째 증시를 통한 자금조달을 하지 않고 있다. 8조원 이상의 현금성자산을 쌓아두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주가부양 등을 위해 매년 엄청난 돈을 쏟아붇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이 회사 순이익은 모두 5조9천5백89억원. 이에 비해 올해 자사주 매입에 쓰는 비용은 비소각분 포함, 모두 4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여기다 연초 배당으로 8천51억원을 썼다. 결국 지난해 벌어들인 돈의 80% 이상을 주주가치 증대 등 상장유지 비용으로 쓴 셈이다. 기업들의 증시 자금조달액보다 비용이 더 많아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증시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익의 절반 이상 주가관리에 사용 전체 상장기업의 지난해 순이익은 18조2천6백9억원에 달한다. 상장사들은 이 중 2조7천억원을 자사주 소각에,7조5천8백억원은 연초 주주배당에 사용했다. 한 해 벌어들인 이익의 56.3%를 주가관리에 쓴 셈이다. 상장사들이 증시를 통한 자금조달보다 오히려 증시에 돈을 투입하는 데 집중하는 것은 무엇보다 주주들의 경영간섭이 갈수록 거세진 결과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특히 외국인들이 국내 주요기업들의 대주주로 등장하면서 이 같은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10월 초 현재 전체 상장사 중 외국인이 2대주주를 차지하는 기업은 1백38개에 달한다. 전체의 20%에 육박하는 수치다.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외국인들의 경우 해마다 주총시즌이 다가오면 고배당 요구는 기본이고 자사주 소각,우량 계열사 보유지분 매각 등의 요구를 내세워 경영진을 압박하고 있다"고 전했다. 삼성전자의 지분 9%를 갖고 있는 미국 캐피털사가 최근 뉴욕 본사이전,미국 DR(주식예탁증서) 상장 등을 요구한 게 대표적이다. 삼성물산의 경우도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영국계 헤르메스가 삼성전자 보유지분 매각을 요구한 적이 있다. 심지어는 SK㈜ 경우처럼 아예 경영권을 요구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상장유지에 따른 간접비용 부담도 만만치 않다. 한 상장사 IR 담당자는 "기업공개 과정에서 투입되는 주간사 수수료 등 각종 비용과 상장후 주주관리 비용 등을 감안하면 사실상 상장에 따른 메리트가 없는 게 현실"이라며 "이 때문에 실적이 좋아 자금조달 필요성이 크지 않은 기업들의 경우 상장을 꺼리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자진 상장폐지 잇따라 상황이 이렇다보니 상장을 스스로 포기하는 기업이 속출하고 있다. 올 들어서만 벌써 5개 기업이 증시에서 빠져나갔거나 자진 퇴출을 준비 중이다. 디와이홀딩스(옛 동양에레베이터) 한미은행 넥상스코리아 극동전선 옥션 등이 그들이다. 특히 외국계가 대주주인 기업의 경우 이런 움직임이 뚜렷하다. 프랑스 넥상스그룹이 넥상스코리아와 극동전선 지분을 공개매수,상장폐지를 추진 중인 것이 대표적이다. 미국 이베이도 코스닥기업인 옥션의 공개매수를 끝내고 등록취소를 준비하고 있다. 넥상스그룹의 공개매수 주간사를 맡은 굿모닝신한증권 한 관계자는 "외국계 기업들은 국내 증시기반이 취약해 주주들에게 쉽게 휘둘리는 데 부담을 느끼고 있다"며 "때문에 우량 상장 및 등록기업을 인수할 경우 굳이 비용부담을 지면서까지 상장을 유지할 필요성을 못느끼는 것 같다"고 전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내년 집단소송제가 도입되면 우량기업들의 탈거래소 현상은 더욱 심화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정종태 기자 jtch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