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과거가 있게 마련이다. 가슴이 저리도록 아팠던 일,민망하고 황당했던 일,차라리 겪지 않았으면 하는 사연들을 갖고 있다. 비단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해도 전쟁 학살 테러 화재 등을 목격하고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성수대교 붕괴,삼풍상가 참사 등으로 아들 딸을 잃은 유가족들이 아직도 정신적인 혼란에 휩싸여 있는가 하면,뉴욕의 9·11테러를 TV로 지켜본 사람들까지도 정신적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불면이나 악몽에 시달리고 있으며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 불리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게 보통이다. 불필요한 기억들을 지울 수만 있다면 치유되는 증상들이어서 소위 '망각의 알약'을 개발하는 일은 과학자들의 오랜 숙제였다. 며칠전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과 프랑스에서 정신적 외상을 치료할 수 있는 알약이 성공적으로 개발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직은 임상실험 단계지만 애초부터 고통스러운 기억이 저장되지 않도록 막아주거나,기억의 고통을 완화시켜 주는 것이 가능하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아울러 기억 전체를 없애는 약도 개발 중이라고 했다. 영화나 공상과학소설에서 있을 법한 일이 현실화되고 있는 셈이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또다른 모습의 은총이라고 하듯,망각 없이 행복을 찾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발자크는 "망각 없이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고 단언했고,앙드레 모루아는 "과거의 불행한 기억을 잊는 것이 행복을 얻는 열쇠"라 했다. 사실 지난 모든 일들을 기억하며 살아간다면 정말 괴로울 것이다. 설사 행복했던 순간이라 해도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이는 또 다른 고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망각의 알약개발이 환영을 받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고통스러운 기억도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일부"라며 사회윤리적 부작용을 우려한다. 그렇다 해도 망각의 알약이 정신적인 고통을 제거하고 사회생활에서의 자신감을 회복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