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東根 < 명지대 교수ㆍ경제학 > 관성의 법칙은 자연현상뿐만 아니라 관념에도 적용된다. 일단 생각이 정리되면 자신의 관념에 반하는 주장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쟁점에 대한 사실인식이 왜곡되기 쉬워 이를 바로 잡기 어렵다. 따라서 옳다고 굳게 믿을수록 오류가 남아 있을 개연성이 커진다. 개혁이 독선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늘 오류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한다. 공정거래법 개정과 관련된 가장 뜨거운 그러나 비생산적인 논쟁은 출자규제가 실제투자를 위축시켰는가 하는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출자규제가 투자를 저해한다는 재계의 주장을 반박해왔다. 반박의 요지는 출자는 '재무적 행위'로서 '실물자본 형성'을 의미하는 투자와 개념적으로 별개일 뿐 아니라 실증적으로도 출자와 투자 간에는 의미있는 '정(正)의 상관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투자와 출자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출자규제가 투자를 제약하는 요인이 아닌 만큼 출자규제를 통해 기업집단의 무분별한 지배력 확장을 차단하는 순기능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실증분석의 타당성을 논할 겨를은 없다. 그러나 출자규제를 적용받는 기업이 출자총액을 초과할 수 있는 출자 및 투자계획을 원천적으로 실행에 옮길 수 없음을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위는 출자 규제로 인한 투자 부진의 '입증 책임'을 재계에 전가했다. 이는 출자 규제로 인한 투자 부진 개연성을 애써 외면하려 한 것이다. 물론 최근의 복합적 요인에 의한 투자부진의 원인을 출자규제로 돌릴 수만은 없다. 그리고 출자가 기계적으로 투자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출자규제를 푼다고 기업의 투자가 살아날 것으로 성급하게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출자규제가 투자를 촉진하는 유리한 제도적 환경 조성에 배치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대기업집단의 계열사들이 다른 기업에 출자하는 이유는 지배력 강화의 목적도 있겠지만 구조조정,사업부 독립,신규사업진출,전략적 제휴 등 기업 가치를 높이는 생산적 투자 목적도 있다. 출자규제를 폐지하면 기업집단이 무분별한 지배력 확장에 나설 것이라는 우려는 '예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배력 확장의 '분별 여부'는 공정위가 판단할 사안이 아니다. 기업은 학습조직이며 이미 외환위기를 통해 팽창욕구를 제어치 못하고 무분별하게 지배력을 확장했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학습했기 때문이다. 결국 무분별한 지배력 확장을 막는다는 명분하의 사전적이고 획일적인 출자규제는 출자의 성격을 구별하지 않음으로 해서 생산적 투자로 연결될 출자마저 규제할 수 있다. 예컨대 부실기업 인수는 출자지만 부실기업 자체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투자를 해야 한다. 따라서 출자는 일정한 시차를 두고 투자에 선행한다고 봐야 한다. 최근 출자비율이 높은 42개 기업을 대상으로 한 재계의 실태조사 결과 출자 규제에 따른 투자의 제약이 7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출자규제로 구조조정,협력업체 지원,경영권 방어 등 정상적인 기업활동에 지장이 초래되고 있으며,출자규제의 적용제외나 예외인정의 기준이 모호할 뿐 아니라 출자초과분을 해소할 때 매각시점을 조절할 수 없는 등 '규제순응비용'이 과다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대해 공정위는 이들 기업은 출자한도가 늘어나면 오히려 기업위험만 커지게 된다고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출자규제가 이들 기업의 '잠재적' 성장기회를 사전에 차단하는 족쇄가 되어서는 안된다. 세계적 글로벌기업 반열에 올라와 있는 S전자와 H자동차도 출발은 조그만 계열사였다. 시장경제의 역동성은 기업의 잠재적 성장 기회를 사장시키지 않을 때 비로소 발현된다. 출자규제는 민간기업의 자율영역에 대한 침해이다. 그리고 기업이 경영권 방어에 진력하는 것은 당연하며 경영권이 안정되지 않고서는 투자가 이뤄질 수 없다. 시장경제체제를 지향하면서 기업의 경제자유를 제한하고 투자를 제약하는 출자규제에 집착할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