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孝鍾 < 서울대 교수ㆍ정치학 > 열린우리당이 이번 10·30 재보선에서 패배했다. 지난 6·5 재보선에 이어 두번째 패배다. 수도권과 영호남에서 치러진 5곳의 기초단체장 선거중 4곳에서 큰 표차로 졌고 7곳의 광역의원 선거는 모두 패배했다. 철원군수 선거에서만 가까스로 이겼을 뿐이다. 물론 열린우리당이 패배를 선택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가 패배를 선택한 것처럼 황당한 일일 터이다. 실제로 이번 선거를 앞두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비롯한 4대 법안을 개혁입법으로 내세우며 대대적 홍보를 했지만 효과가 없었던 셈이다. 환자가 고통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선택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열린우리당도 선거 패배를 선택할 수는 없었겠지만,패배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선택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 선거가 33.1%의 낮은 선거율에 불과한 지방선거였다며 애써 자위한다면,그것도 패배를 받아들이는 하나의 태도이다. 하나, 그것은 달을 바라보기보다 달을 가리키는 손을 바라보겠다는 얄팍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보다는 민심을 헤아리지 못한 것을 반성하겠다는 결의를 다질 수도 있지 않을까. 유권자를 무서워할 줄 아는 정치, 자신의 치부가 드러난 걸 부끄러워할 줄 아는 정치를 하겠다며, 심기일전(心機一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정치는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온갖 재앙과 오물들을 쏟아내놓는 원천이 되고 있다. 정치에서 오가는 말들은 금과옥조가 아니라 쓰레기에 불과할 뿐이다. 또 대화와 타협의 정신보다 전의를 불사르고 살기등등한 언사를 예사로 하며 파행을 겁내지않는 '용감한 정치'야말로 '벌거벗은 정치'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벌거벗은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정작 정치인들은 부끄러운 줄 모른다는 점이다. 자신의 잎을 모두 떨어뜨린 가을의 나목(裸木)은 처절하게 보이지만, 추하지는 않다. 모든 걸 버리고 모든 걸 내주는 '무소유'로 나섰기 때문에 그 벌거벗은 모습이 오히려 아름답고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예의와 절제, 겸양의 정신없이 정략과 전략적 사고만이 배회하고 있는 정치는 그렇지 않다. 왜 정치가 벌거벗었을까. 오만과 아집, 적개심으로 가득차 상대방을 '공존해야할 라이벌'보다 '소멸시켜야 할 적'으로 보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정치를 전투로 착각하는 것이 '벌거숭이정치'의 본질이다. '벌거숭이정치'는 '벌거숭이산'처럼 보기가 민망하다. 이 시점에서 99마리의 양을 가진 부자가 1마리의 살찐 양을 가진 가난한 사람을 질투하며 빼앗으려 한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 급해서 과반수 의석을 가진 부유한 정부·여당이 국보법 폐지, 신문법, 과거사 규명법, 사학법 등 당사자들이 한사코 반대하고 있는 법안에 목을 매고 밀어붙이려는가. 4대 법안보다 민생과 경제가 시급한 국정 아젠다가 돼야 한다는 다수의 여론이 무서운 줄 몰라서일까. 이념정치와 편가르기에만 매달리는 한 정부·여당은 열매 없는 나무를 심는 셈이며,알맹이는 없고 쭉정이만 남는 농사를 짓는 셈이다. 그 동안 정부·여당은 부끄러움을 모를 뿐 아니라 무서운 것도 없었다. 야당의 비난과 비판은 여당으로서의 자격지심 때문에 모른 척하고 무시할 수도 있다고 치자.하지만 국민은 무서워해야 할 존재가 아닐까. 아니면 무서워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회 원로들이 말해도 과거를 거론하며 어려워하는 기색이 별로 없고 헌법재판소의 권능도 인정하기를 꺼린다. 여론조사의 결과도 개의치 않는다. 그것은 정부·여당이 호랑이 소리를 들어도 무서워하지 않다가 곶감만 원했던 아이처럼 '무서운 아이'가 됐기 때문일까. 국회가 파행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반수 의석으로 단독 운영하면 된다고 하면서 천하태평이라면 무서운 게 없다는 의미이다. 하나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다고 해서 '천둥벌거숭이'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정부·여당은 무서워할 줄도 모르고 또 부끄러워할 줄도 몰랐기 때문에 선거에서 패한 것이다. 이번 패배를 통해 여론 무서운줄 알고 부끄러워할 줄도 알게 된다면, 입에는 쓰지만 양약(良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