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영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 수출기업은 이제 환율이라면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다. 환율이 불과 한달여만에 50원 가까이 떨어져 외환위기 이후 최저수준을 기록하고도 모자라 심정적 저지선이라 할 만한 1천1백원선마저 위협하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겨우 몇십원 갖고 웬 호들갑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낮은 채산성으로 고민하는 수출기업들이 앉은 자리에서 엄청난 손해를 보는 심정을 헤아려보지 않고는 모른다. 무역협회가 긴급히 주요 수출기업을 대상으로 모니터링한 바로는 손익분기점 환율이 1천1백20원대로 이미 현재 환율수준에서 80∼90%가 출혈 수출에 직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 70%의 기업이 신규 오더 수주를 주저하고 있으며,10개 중 1개 기업은 이미 기존 수출물량을 취소한 경험이 있을 정도로 위기 국면을 맞고 있다. 더욱 우려되는 사실은 그동안 국내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춰 환율 변화에 비교적 덜 민감하게 반응했던 대기업마저도 급격한 환율 하락에 크게 당혹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 만난 한 대기업 CEO는 1천1백원대 이하 환율이라면 내년 수출계획을 대폭 수정해야 한다고 실토하는 등 위기의식을 표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런 데도 우리 수출과 환율에 대한 잘못된 오해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어 안타까운 심정이다. 즉 최근의 원화절상 용인 논의가 바로 그것인데 자칫 우리나라의 수출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리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첫째,우리 수출이 반도체 자동차 휴대폰 등 대기업이 만든 제품이 주도하고 있으므로 원화절상에 중소기업은 타격을 받더라도 전체 수출에는 큰 영향이 없으리라는 견해다. 그러나 이미 일부 대기업에서도 원화절상에 대해 매우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을 뿐더러 주요 5대 품목 모두 아직 일본 중국 등과 힘겨운 경쟁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이 산업들은 앞으로 1∼2년이 세계적 선도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시기로 환율변동에 의해 경쟁력이 약화되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 원화절상으로 한번 경쟁국에 빼앗긴 수출시장을 되찾는 것은 현재의 수출시장을 지키는 것보다도 몇배 힘들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내수부진의 원인이 지난 수년간의 원화가치 저평가에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최근의 내수부진 원인을 환율에서 찾기보다 오히려 가계부채 누적과 신용불량자 확대,고용 불안,정책 및 국내외 환경 불확실성에서 찾는 것이 훨씬 수월할 것이다. 특히 이러한 구조적 문제점이 아직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수출의 희생을 통해 내수회복을 도모하는 시도는 자칫 수출도 잃고 내수회복도 얻지 못하는 어려움에 빠질 여지가 충분하다. 우리가 과거 외환위기 이전에 대규모의 경상수지 적자에도 불구하고 원화가치의 고평가를 무리하게 유지하다 결국 외환위기를 맞았던 경험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셋째는 수출호조로 어느 정도의 원화절상은 감내할 수 있다거나,원화절상이 기술개발을 자극해 기업경쟁력을 제고시킨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는 부족한 원천기술로 힘겨운 경쟁을 치르고 있는 우리 기업의 현실을 외면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오늘날과 같은 무한경쟁 속에서 기술개발과 설비투자는 채산성이 확보될 때에만 가능한 것이며 원화절상으로 수출기업이 한계상황에 내몰릴 경우에는 기업도산과 해외이전 가속화로 국내 산업기반이 뿌리째 훼손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내년 무역환경은 환율하락 외에 미국 등 선진국의 경기둔화,중국의 긴축정책과 위안화 절상,고유가 지속 등 산적한 악재로 금년에 비해 악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러한 때 환율마저 하락한다면 수출기업은 3중고,4중고의 어려움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 지금은 무엇보다 환율안정을 바라는 기업의 다급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환율은 기본적으로 시장에서 결정돼야 하지만,환율이 최근과 같이 급속도로 하락하는 경우 환율의 안정적인 운용을 통해 무역업계가 안심하고 수출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는 수출기업이 원가절감 등을 통해 원화절상을 감내하고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우선 구해 놓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