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풍운아' 야세르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의 상징이었고,그의 생애 자체가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라파트는 1929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이슬람 수니파였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본인은 줄곧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출생했다고 주장해 왔다).어릴 때부터 말 잘하기로 유명했고 돈도 잘 썼으며 공부도 잘했다. 카이로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던 그는 '팔레스타인 학생연합'에 가입,4년간 의장을 맡으며 저항 운동가로서의 기초를 닦았다. 30세 때인 58년 쿠웨이트에서 이스라엘을 상대로 한 투쟁단체 '파타'를 창설하면서 본격적으로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시작했다. 파타는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공격을 주도한 단체로,이후 그의 평생에 걸친 정치적 기반이자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중추가 됐다. 67년 중동전에 4백50여명을 직접 이끌고 참가한 아라파트는 69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으로 선출되면서 팔레스타인의 대표 인물로 급부상했다. 국제사회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의장이 된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유엔의 구호 물자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한 세계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해 존경심을 갖지 않는다"며 무장투쟁 위주의 노선을 걸어갔다. 이후 아라파트는 항공기 납치,암살,자살특공대,차량 폭탄테러 등을 주도하는 테러리스트로 악명을 떨쳤다. 특히 72년 독일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을 살해한 사건을 배후에서 주도,전 세계를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이후 이스라엘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시리아 레바논 튀니지 등지를 떠도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위기 때마다 뛰어난 변장술로 이를 모면,'사막의 불사조''9개의 목숨을 가진 고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50여차례의 암살위협 속에서도 살아 남았고,85년 이스라엘이 폭격기를 동원,73명을 숨지게 한 튀니지 해방기구 본부 기습 폭격 때도 그는 무사했다. 80년대 후반부터는 무쟁투쟁과 평화협상을 병행하기 시작,88년 12월 마침내 무장투쟁 포기선언을 해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면서 미국과의 대화창구를 열었다. 미국은 이후 92년 리비아 사막에서 비행기 사고로 실종됐던 그를 인공위성까지 동원,구해내기도 했다. "나는 팔레스타인과 결혼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라파트는 61세 때인 90년 34세 연하인 자신의 경제보좌관 수하 알타윌과 결혼,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94년 팔레스타인 긴장이 완화되면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다음해 라빈 총리가 이스라엘 극우단체에 암살되면서 평화무드는 다시 깨지고 말았다. 96년 발족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초대 수반으로 취임했다. 그의 말년은 고뇌와 고통의 연속이었다. 2001년 12월부터는 이스라엘에 의해 라말라 시내 자치정부 청사에 가택 연금돼왔다. 거기서 그는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무력하게 듣고만 있어야 했다. 부인 수하와도 오래 전부터 별거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스위스 비밀계좌에 수십억달러의 비자금을 예치해 놓았다는 소문도 그에겐 오점이었다. 김선태 기자 k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