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졸 등대지기,KAIST 출신 기관사,석사 학교조무원…. 다양한 직종군에서 '학력파괴'가 잇따르고 있다. 해당 직업이 필요로 하는 학력수준을 웃도는 구직자가 대거 몰리면서 '학력인플레'가 보편화되는 추세다. 극심한 취업난 속에 '몸을 낮춰서'라도 취업을 하고보자는 '실속파'가 늘어나는 까닭이다. 부산동의공업대학을 졸업한 이흥석씨(29)는 인천 팔미도 항로표지소에서 '등대지기'(기능직10급)로 일하고 있다. 올 초 인천지방해양청의 등대원 특별채용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연봉은 수당을 합쳐 1천5백여만원. 섬에서 생활하며 한 달에 1주일 정도만 육지로 나올 수 있는 '고독한' 직업이지만 취업을 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졸업 후 전산 관련 회사에 근무하던 중 장래를 생각해 안정적인 공무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게 이씨의 말. 당시 2명을 뽑는 등대원 채용에 57명이 몰려 역대 최고 경쟁률(28.5대1)을 기록했고 이씨와 또다른 대졸자가 선발됐다. 이씨는 "영도등대 소장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등대와 친숙해 지원했는데 생각보다 고학력자들이 몰려 적지않게 놀랐다"고 말한다. 전북대 교육대학원 석사인 남궁숙씨(29)는 지난 3월 일선 학교에서 교사들의 업무를 돕는 조무원(기능직 10급) 시험에 합격,서울 강동구 성내중학교에서 일하고 있다. 남궁씨는 "대학원 졸업자라고 조무원을 못할 이유가 없으며 현재 업무에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충원된 교육공무원의 경우 가장 하급직인 9급과 10급 시험에도 석사출신이 많다. 행정직 9급은 1백명중 18명이,기능직 10급의 경우 2백26명 중 3명이 석사 출신이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출신 과학도가 지하철 기관사로 일하는 경우도 있다. 대구지하철 기관사 제준호씨(32)는 KAIST 기계공학과 출신. 96년 졸업 후 대기업에 취직했던 그는 99년 2월 '다른 길'을 찾아 사표를 냈다. 하지만 외환위기의 여파로 새 도전이 쉽지 않았고 지난해 말 대구지하철 공사 승무직 신입으로 입사하면서 '연령제한 막차'를 탔다. 서울 구로구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조재천씨(40·전문대졸)는 동료 중 '최고학력자'다. 지난해 12월 구로구의 환경미화원 채용에 지원해 대졸자로는 유일하게 합격했다. 각종 통계에서도 이 같은 '학력과잉'이 여실히 나타난다. 11일 노동부 산하 중앙고용정보원의 '2003년 산업·직업별 고용구조조사'에 따르면 국내 직업 중 26%가 '학력과잉' 상태인 것으로 조사됐다. 국내 3백83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평균 학력과 그 직업을 가지기 위해 요구되는 학력을 비교한 결과다. 이 결과 '학력과잉'이 99개로 26%에 달했다. 특히 20대(46.46%),30대(38.16%)에서 학력과잉이 두드러져 최근의 청년실업난을 반영했다. 중앙고용정보원의 전근하 연구원은 "선박열차승무원,경찰관,철도 및 지하철기관사 등 공기업 부문에서도 '과잉학력자'가 많았다"며 "어려운 취업현실과 맞물려 안정적인 직업을 찾는 구직자들이 학력을 낮춰서라도 공기업에 취업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실제 취업전선에서도 '하향지원' 추세가 분명히 감지된다. 취업포털 잡링크가 지난 8월부터 10월까지 고졸을 찾는 구인광고에 지원한 1만9백23건을 분석한 결과 42.1%(4천5백98건)가 '대졸 이상'이었다. 이 가운데는 전문대졸 지원자가 63.2%로 가장 많았고,대졸 지원자가 35.6%로 뒤를 이었다. 석사 이상의 대학원 지원자도 1.2%나 됐다. 잡링크 한현숙 대표는 "취업 후 만족도가 직장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큰만큼 무조건적인 하향지원은 지양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혜수·송형석·이태명 기자 dears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