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숙 < 시인 > 이즈음 '살기 어렵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나는 왜 이토록 각박해진 것인지를 종종 화두로 들고 생각에 잠긴다. 살기 어려워진 데는 경제 불황이 큰 이유가 된다. 그래서 우리가 곧장 절망을 느껴야 할까? 이 점을 조금 에둘러서 말해보자. 과학자들은 인문학자들의 정의와는 달리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해 또다른 설명을 내놓고 있다. 최근에 읽은 '과학에서 생각하는 주제 100가지'에는 바로 이 '형이상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해 놓았다. "과학자들의 통상적인 언어에서 '형이상학적'이란 말은 '불분명한' 혹은 '공상적'이라는 말과 다소간 동의어이다. 무상한 사색에 속하고 견고한 사실이나 실험적 증거들에 확고하게 근거하지 않는 모든 것은 형이상학적이다." 실험적 증거와 견고한 사실일 리가 없는 형이상학은 우리 삶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 삶은 불가사의한 부분과 또 이와 다른 차원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도 크게 좌우된다. 과학적 입장과는 달리 우리 삶에는 인문학적인 전통,인본적인 전통이 큰 비중으로 깔려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과학적인 접근과는 다른 새로운 전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를 과학적 입장을 도외시한다거나 폄하한다고 간주할 필요는 없으리라. 눈을 우리 발 밑에 돌려보자. 우리 삶의 하중은 일용직 노동자,노점상,영세 자영업자,중소기업인에게 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나는 인문주의자로서 이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언젠가는 당신들의 시대가 올 것이니,희망을 가지라"고. 희망은 그저 맹목적인 바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희망은 사실 힘이 아주 세다. 우리가 삶에 대해 회의하기는 쉽지만 긍정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희망은 긍정하는 마음에서 싹튼다. 긍정하면 희망이 생기고,다시 희망은 용기와 할 수 있는 자신감을 선물로 돌려준다. 저 어두운 시대를 관통해 살아온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그의 저서 '희망의 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두려움보다 우위에 위치하는 희망은 두려움과 같이 수동적이 아니며,어떤 무(無)에 갇혀 있는 법이 없다. 희망의 정서는 희망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편협하게 만든다기보다는,그 마음을 넓혀준다. 희망의 정서는 비록 외향적으로는 인간과 결속돼 있지만,내향적으로는 목표를 설정함에 있어서 모든 것을 미리 충분히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희망을 찾아내려는 작업은 다음과 같은 인간형을 필요로 한다. 즉 고유의 자신을 되찾으려고 스스로 변모시키며 고유의 자신을 투영하는 인간형 말이다." '고유의 자신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삶의 어려움이 가중되면 우리는 누구나 또다른 어두운 생각 속에 함몰되기 쉽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성찰의 힘과 해낼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한 일인데 반해 절망은 패배의식이라는 달콤한 유혹과 함께 온다. 게다가 희망에는 함정이 있다. 거짓 희망에 속아서,시대와 삶을 속이는 일도 발생한다. 그런데 이는 역사를 통찰할 때 극복할 수 있다. 우리는 큰 어려움을 헤치고 오늘 이 자리까지 왔다. 오늘의 어려움을 우리가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역사에서 증명된다. 희망을 가진다면 우리는 이윽고 출구를 발견하고,미로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당면한 고통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고통스러운 시간은 더디게 가고,즐거운 시간은 빨리 간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역사적 감각까지를 놓쳐서는 안되리라고 나는 생각하곤 한다. 예컨대 우리 부모 세대가 우리를 기를 때 지금보다 더한 고통이 없었을까?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좀더 멀고 깊게 보아야 한다. 고통에 관한 한 아직 면역되지 않은 영역이 분명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일찍이 프랑스의 시인 랭보도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그저 극복이 전부인 것을"하고 노래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마음산책 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