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상장기업의 주식을 사들이고 있는 국민연금을 비롯한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를 반대하고 나섰다. 연기금의 의결권 문제는 경제계에 양날의 칼과 같은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사실. 내부 지분율이 취약한 대기업들은 외국인의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노출됐을 때 연기금을 유력한 원군으로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연기금의 지분율이 높아져 주주총회 등에서 발언권을 확대할 경우 민간기업에 대한 정부의 경영개입으로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재계는 이 때문에 내부적으로 입장을 정리하는 데 상당한 논의를 거쳐야 했다. 섣불리 반대했다간 정부의 '뉴딜 프로젝트'와 경제활성화 명분에 반기를 드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기왕 경제 관련 법안들이 대거 국회 통과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인 만큼 이번 기회에 의견을 확실하게 밝히지 않을 경우 미래의 부담이 더 커질 것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왜 반대하나 재계는 경영자율성의 침해 가능성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총 1백20조원의 금융 운용자산을 갖고 있는 국민연금의 경우 지금은 대기업 지분율이 미미한 수준이지만 투자규제 족쇄가 풀릴 경우 웬만한 기업의 대주주로 올라설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이 경우 일상적인 경영활동은 물론 지배구조를 비롯한 핵심 현안들에 대한 의사결정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실제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퇴직연금인 캘퍼스(CalPERS)는 최근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월트디즈니의 최고 경영자를 교체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게다가 현행 증권거래법은 지분이 5%를 넘으면 공시하도록 돼 있지만 연기금은 예외 적용을 받는다. 해당 기업 입장에선 연기금이 갖고있는 지분을 즉각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물론 연기금이 민간기업의 경영권을 장악하는 경우는 지극히 제한적이겠지만 사외이사 선임 요구 등을 통해 이사회 진출을 시도할 가능성까지 차단돼 있는 것은 아니다. 모 기업 관계자는 "사실상 정부의 입김 아래에 있는 인사들이 기업경영에 개입하거나 간섭할 수 있게 된다"며 "외국인의 적대적 M&A 가능성도 부담스럽지만 정부의 간섭을 받는 것도 싫다"고 말했다. ◆재계 요구 수용 가능성은 재계의 요구가 수용되기까지는 상당한 논란이 예상된다. 정부 관계자는 "재계의 불안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무엇보다도 국민연금의 의결권을 제한할 법적·논리적 근거를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대기업 경영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정서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는 점도 부담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다 국민연금의 경우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들의 주주총회에서 그동안 발언권을 높여온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2002년 제일기획,2003년 현대모비스,2004년 KCC 주총 등에서 경영진의 결정에 반대표를 던지는 등 의결권을 적극 행사한 것.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은 "이제 막 입장을 밝힌 만큼 앞으로 정부와 정치권을 상대로 지속적인 설득작업을 벌여나갈 계획"이라며 "경제계의 의견을 오해 없이 액면 그대로 받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