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응백 < 문학평론가 > 휴대폰을 이용한 대규모 수능 부정 사건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하다. 사실 시험 부정 사건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다. 과거장에 책을 숨겨 들어가기도 하고(협서),대리로 남의 답안을 작성해주기도 하고(차술),아예 응시자와 시험관이 결탁하는 수도 있었다(혁제). 학교를 다니면서 커닝 행위를 목격하거나 자신이 커닝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던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커닝의 방법도 다양하다. 공부 잘하는 학생의 답안지를 훔쳐보거나, 책상 위에 예상 답안을 작성해 활용하거나, 작은 쪽지를 사용하기도 한다. 쪽지에 고무줄을 매달아 치마 속에 넣고 감독 교사가 다가가면 고무줄을 놓아 버리는 과감한 여학생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커닝 행위들은 대부분 은밀하게 개인적으로 소규모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이번 부정 사건과 비할 바가 아니다. 이번 부정 사건은 규모 면에서 부정행위의 신기원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한편으로 IT 강국의 현주소를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국가가 관리하는 가장 큰 시험에 이런 대규모 불상사가 일어났다는 것은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은 직접적으로는 사건을 저지른 학생들의 과욕에서 비롯됐지만, 본질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이번 사건의 책임이 있다. '공부 9단 오기 10단.''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막노동꾼 출신 서울대 수석합격자 장승수 이야기.''서울대쯤은 누구나 갈 수 있다:보통 학생들의 공부 역전 프로젝트.' 이 목록은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던 책들이다. 이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는 요인은 간단하게 말해서 하버드대나 서울대와 같은 일류 대학을 꿈꾸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고,그런 대학만을 대접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물론 노력해서 일류대학에 들어가야 하겠지만 우리 사회는 과정보다 결과를 훨씬 소중히 여긴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든 일류대학에만 들어가면 인생은 보장된다는 식의 학벌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런 식의 부정 입학 사건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민족사관고등학교를 2년만에 수석으로 졸업하고 하버드대를 비롯 미국 10개 명문대에 입학 자격을 받았다는 경천동지할 실력을 갖춘 학생의 이야기가 바로 '공부 9단 오기 10단'의 내용인데,이 책을 고등학교 1학년인 딸에게 갖다 주었더니 딸아이가 조금 들여다보다가 한마디로 '왕짜증' 이라고 한다. 최하위 수학점수를 기록해 학원 선생님으로부터 수학을 못하는 아이라고 면박받다가 1년 만에 수학경시대회에 나가 금상을 받고 토플 시험을 따로 공부한 적도,토플 학원을 다닌 적도 없는 학생이 단 두 달 만에 토플 고득점자가 됐다니 보통 아이들은 '왕짜증'이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몇년 전 서울의 한 대학에서 교양강의를 할 때 나는 학생들에게 자극을 줄 목적으로 대충 이런 내용의 발언을 했다. "대한민국 사회는 신라 사회보다 더 지독한 골품제 사회다. 대한민국에서 서울대를 나오면 성골(聖骨)이다. 연· 고대를 나오면 진골이다.그리고 이른바 무슨대 무슨대 등을 나오면 6두품이다. 너희들은 지금 5두품이다. 5두품이기에 발군의 노력을 해야 겨우 너희들은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난 다음 기말시험에 한 학생이 답안지 말미에 대충 이런 내용을 적어놓았다. "교수님이 하신 말씀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저는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초등학교밖에 못나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지만 저에게는 성골보다 더 존귀하신 분이고,형님은 전문대를 나와 자동차 조립 공장에서 노동을 하지만 진골보다 더 훌륭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수님이 저희들에게 분발하라고 하신 말씀이겠지만,그리고 현실이 그럴지도 모르지만,저는 저희들 나름대로 긍지와 보람을 느끼면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그 학생의 이름도 잊어버렸지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그래,네가 진정한 성골(聖骨)이다." /휴먼앤북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