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정지용 ‥ 박진숙 <작가정신 대표ㆍ시인>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 박진숙 작가정신 대표ㆍ시인 jakka@unitel.co.kr >
우리 시인들 중에 그 이름만 불러도 멋들어진 아취를 불러일으키는 시인이 있다.
정지용이다.
외람되이 성도 존칭도 떼고 '지용은…,지용이…,지용의…' 하고 지칭할 때 어쩐지 친근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다.
그런 지용에 따라 붙어서 순식간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입김,유리창,산새,언 날개같이 그의 시 '유리창'에서 기인한 것들과 실개천,얼룩백이,금빛,발벗은 안해 등 '향수'에서 온 것들이다.
지용은 바로 시 '향수'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중략)" 이 시는 한 가수가 노래로 불러서 고향 없는 사람들에게조차 고향을 심어준 범국민적 시다.
정지용은 몰라도 이 노래는 대부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용의 '향수'보다 '유리창'을 더 좋아한다.
소설이 다가오면서 아침 햇살이 점점 늦어지고 오후 5시만 되어도 어둑어둑해지는 이맘 때면 나는 지용의 '유리창'이 자꾸 떠오른다.
처음 그 시를 읽었을 때 부딪쳤던 아린 감흥 때문이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물먹은 별이,반짝,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아아,늬는 산ㅅ새처럼 날러갔구나!"
겨울날 차가운 유리창에 붙어서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으면 입김이 창에 어렸다가는 사라지고 또 어렸다가는 사라진다.
그 어렸다 사라지는 모양이 별 같기도 하고 파닥거리는 새 같기도 한 것이다.
게다가 밤에 홀로 유리창을 닦는다! 외로운데 황홀하다는 심사의 표현이 나는 좋았던 것이다.
하루 일을 끝내고 창 밖을 내다볼 때 언제나 바깥 세상과 나 사이에 유리창은 놓여 있다.
캄캄한 밤이라면 더욱 유리창은 차고 투명하게 느껴진다.
복잡하고 때로는 숨가빴던 일상이 여과되는 시간에 유리창 밖으로 잠시 세상을 건너다보는 마음과 맞아떨어져서 '유리창'은 지용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내게 서정을 회복시켜주었다.
알고 보니 이 시는 지용이 어린 자식을 잃은 직후 쓴 시다.
또 이 시에는 놀랍게도 지용의 최후가 예견되어 있다.
시인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운명을 감지했던 것 같다.
지용은 육이오 동란 중에 폭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산새처럼 날아간 것이다.
49세,평양 감옥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