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 90년대 세계경제의 화두로 내세운 것은 '지식기반경제(Knowledge-based Economy)'였다. 전통적 생산 3요소인 토지,노동,자본을 넘어 '지식'이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가 될 것이란 메시지였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OECD의 화두는 한단계 업그레이드됐다. 이번에는 '성장(growth)'이다. 경제규모가 커지지 않고는,경제활동인구가 늘어나지 않고는 국부든 개인의 부이든 풍요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으로 잡은 테마다. OECD의 영향력을 고려하며 과장을 좀 섞어 얘기하면 세계의 정치지도자,조직 리더,기업 경영자들은 지금 '어떻게 하면 성장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밤잠을 설치고 있어야 정상이다. 원화 환율이 급전직하로 떨어지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들이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 축소지향형 구조조정에 나섰다는 소식이다. ▶한경 11월29일자 A1,3면 참조 이들 기업이 총인건비를 동결하고 지원조직을 감축하며 신규투자를 억제하는 비상계획 가동을 시작하면서 한국의 회사 사회에는 다시 찬바람이 불고 있다. 하기야 환율이 1백원 떨어지면 6천억원(현대자동차) 내지 1조원(삼성전자) 매출이 줄어든다고 하니 이들 대기업이 '살아남기 위해' 이런 고강도 구조조정을 벌이는 작업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인지도 모른다. 걱정은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 여건 때문에 투자를 제대로 하지 못하던 기업들이 투자는커녕 지출을 줄여야 할 형편이 됐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다 그동안 침체에도 불구하고 오름세를 타던 골프장 회원권값까지 큰 폭으로 하락해 일본형 거품붕괴 모습도 보이고 있다니 암담하기까지 하다. 세계가 '성장'에 매달려 있는 판에 우리는 반대로 '생존'에 목숨을 걸고 있으니 정말 안타까운 노릇 아닌가. 그래서 지금 우리 기업들이 벌여야 할 것은 성장을 담보하는 구조조정이어야 옳다. 이 기회에 기업의 전략이나 조직 구조,관행 등을 '혁신지향적(innovation-driven)'인 것으로 바꿔가야 한다는 얘기다. 방향은 혁신 개념 그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혁신은 한마디로 시장이 필요로 하는 새로운 상품,새로운 서비스,새로운 방법론을 개발해 신규수요를 장악하는 일이다. 모든 것을 줄일 것이 아니라 회사의 모든 역량을 이런 혁신을 이룰 수 있는 조직,문화,인적자원을 구축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대신 수십년된 조직,사업,지점,부서라도 더 이상 시장에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도모할 수 없다면 과감하게 버리는 결단도 필요하다. 구조조정 바람이 주는 가장 큰 문제는 부작용이다. 예를 들면 사장이 '축소'를 지시하면 임원들이 달성하기 어려운 수준의 목표 수치를 제시하면서 일이 커지기 시작한다. 부장들이 주어진 수치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아랫사람을 들볶는 과정에서 회사 분위기는 엉망이 된다. '모든 부분에서 20% 줄이기'식의 구조조정 단골메뉴가 등장하는 것도 이 때다. 이런 식으로 흐르면 회사는 목표했던 것과 달리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자산이나 인적자원 같은 유형적인 것은 물론 노하우와 같은 지식,믿고 충성하던 사원들의 애사심,종업원들의 자부심,모험을 거는 기업가 정신,그리고 사장마인드와 같은 주인의식 등이 이 과정에서 사라져간다. 이런 무형자산들이 바로 혁신의 밑바탕인데도 말이다. 지난 97년 경제위기 당시 구조조정 과정에서 와해된 우리의 기업문화나 조직역량이 여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피할 수 없는 구조조정이라면 양적 구조조정이 아니라 성장까지 도모할 수 있는 질적 구조조정을 지향해야 옳다는 얘기다. 한경 가치혁신연구소장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