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이웃속으로] (3) 희망의 끈 '기업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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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은 겹쳐서 온다.
삶의 무게에 휘청이는 모습을 즐기듯,한 사람의 어깨에 서로 다른 시련을 얼마든지 내려놓는다.
소녀가장으로 자란 박윤희(23)·윤선(21)씨.이들 자매에게도 삶은 가혹했다.
1989년 전북 순창.어린 자매에게 불행이 시작됐다.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어린 남동생을 데리고 종적을 감췄다.
여덟살난 윤희에겐 소녀가장이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지독한 가난이 그들을 짓눌러왔다.
끝이 아니었다.
재가한 어머니와 살던 남동생이 새아버지에게 맞아 숨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얼마 안가 함께 살던 할머니에게 치매가 왔다.
소녀가장의 임무엔 정신이 온전치 않은 할머니의 대소변 수발까지 더해졌다.
윤희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91년 겨울,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임종을 앞두고 인근 큰아버지집으로 옮겨진 할머니는 숨을 거두기 직전 큰아버지 손을 꽉 그러쥐었다고 했다.
어린 자매가 눈에 밟힌 듯 쪼글쪼글한 손등이 흐느끼듯 경련했다고 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삶의 비정한 단면을 일찌감치 알아야 했던 자매.하지만 정작 견디기 힘든 것은 가난이 아니라 외로움이었다.
세상에 내던져진 듯한 '고립무원'감에 자매는 며칠을 부둥켜 안고 통곡을 했다.
"막막하고 무섭고 불안했죠.얼마나 울었는지 나중엔 눈물도 나오질 않았어요."(윤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자매는 큰집에서 살게 됐다.
가난한 농사꾼으로 육남매를 둔 큰아버지 역시 조카들을 거두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병으로 누워지내던 큰어머니 대신 자매가 살림을 맡았다.
학교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내달렸다.
도시락 반찬은 김치.겨울이면 땔감을 찾아 나무를 하러 다녔다.
"학교에 있는 시간이 제일 마음 편했어요.
좋은 분들이셨지만 넉넉지 않았으니 어린 마음에 적잖게 주눅이 들었나봐요."(윤희)
그런 자매에게 92년 '뜻밖의 사랑'이 다가왔다.
삼성복지재단이었다.
매달 전해지는 후원금도 적잖은 도움이었지만 매년 열린 소년소녀가장 캠프는 둘도 없는 선물이었다.
그날만큼은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펼 수 있었다.
"같은 처지의 친구들이 있다는 것.혼자가 아니라는 것.터놓고 허물없이 하루를 지낼 수 있다는 것.정말이지 눈물이 나도록 행복했어요."(윤선)
삼성복지재단의 후원을 받고 자란 자매는 10년여가 지난 지금 나란히 '삼성인'이 됐다.
2000년 윤희씨가 삼성전자 LCD(액정표시장치) 천안사업장에서 일하게 됐고 이듬해엔 동생 윤선씨도 한 기숙사에서 지내게 됐다.
두사람 모두 특혜가 아닌 정식 지원절차를 거쳤다.
"삼성복지재단을 알면서부터 삼성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는 것.
윤희씨의 경우 유리기판위에 반도체 박막을 입히는 라인의 팀장격으로 일하고 있다.
남다른 성실성을 인정받아 작년에는 특진도 했다.
1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한 귀한 '상'이다.
LCD 부서장인 최영호 과장은 그런 윤희씨를 부서 1백60명 중 첫손에 꼽는다.
"2년여를 지켜봤는데 일을 배우려는 자세나 근면성,회사 사랑이 아주 두드러졌어요.나중에 물으니 예전에 복지재단 후원을 받았고,입사하는 게 꿈이었다고 하더라고요.아하,그랬죠."
'삼성'이라는 이름의 손을 잡고 외로움을 떨쳤듯,자매는 이제 스스로 타인에게 내미는 '손'이 되어주고 있다.
입사후부터 매달 삼성복지재단을 통해 작으나마 소년소녀가장을 위한 후원금을 보내고 있고 두달에 한번씩은 고향의 복지회관을 찾아 지체장애인들을 돌보고 있다.
"인생이 비스킷통이라고들 하잖아요.맛없는 과자가 먼저 나오면 맛있는 것이 남아있다고.그것이 희망이라고,어쩌면 인생은 우리에게 '삼성'이라는 이름으로 희망을 준비해 놓고 있었던 것 같아요."(윤희)
"신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준다고 해요.돌이켜보면 많이 울었지만 그만큼 많이 웃기도 했어요.받은 것보다 더 나누고 싶어요.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을요."(윤선)
사랑과 나눔의 소중함을 아는 스무살 처녀로 자라난 자매의 웃음은 유난히도 맑고 고왔다.
글=김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