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院산책] (15) 범어사 금어선원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쓱,싹,쓱,싹.' 아침 6시를 조금 넘긴 시각.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부산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경내에 비질 소리가 가지런하게 울려퍼진다.
장갑을 끼거나 마스크를 한 채 빗자루를 잡은 사람들은 20여명.범어사 금어선원(金魚禪院)에서 동안거(冬安居)를 시작한 수좌들이다.
이들은 매일 아침 공양(식사)을 든 뒤 선원과 대웅전 앞 마당에서부터 일주문까지 비질을 한다.
새벽 2시에 일어나 전각을 모두 참배한 뒤 일주문 밖까지 손수 비질을 했던 전 조실 동산(東山.1890~1965) 스님 이래 줄곧 이어져온 금어선원의 전통이다.
정갈한 산사에서 청소할 게 뭐 그리 많으랴만,수좌들이 쓸어내는 것은 '마음의 번뇌'가 아닐까.
석달 간의 만행을 끝내고 선방에 다시 돌아온 수좌들의 비질소리는 그래서 더욱 힘차다.
"금어선원은 경허 용성 만해 동산 탄허 지효 고암 성철 범룡 일타 광덕 스님 등 대선지식들이 용맹스럽게 수행했던 도량입니다.
명안(明眼) 종사의 산실이자 한국 선종의 심장부라 할 수 있어요.
태백 정맥의 마지막 줄기가 닿은 곳인데다 바다가 지척이어서 도량이 맑고 힘차요.
여기서 공부하면 수좌 모두가 일당백(一當百)입니다."
금어선원에서 20년 이상 정진해온 유나(維那·선방의 총괄 책임자) 인각(仁覺·64) 스님의 설명이다.
범어사에 처음 선원이 생긴 것은 1899년.당시 주지이던 성월 스님이 금강암에서 임시 선회(禪會)를 열고 금강선사(金剛禪社)를 열었던 것.이후 안양암 계명암 내원암 원효암 등에 잇달아 선사가 생겼고 마침내 1910년 범어사 경내에 금어선사가 개설됐다.
범어사와 산내 암자에 무려 9개의 선원이 운영됐고 1913년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으로 지정될 당시 선객이 1백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1929년 동안거부터 동산 스님을 금어선원 조실로 모셨는데 그때에도 70∼80명의 수좌들이 정진했다고 해요.
동산 스님은 매일 동래로 온천장으로 탁발해서 대중을 먹여 살리면서도 오는 스님은 누구라도 흔쾌히 받아들였고 떠나는 스님은 안타까워하면서 막았어요.
그러면서 '목숨 바쳐 정진하라.그러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강조하셨지요."
범어사가 선찰대본산의 전통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동산 스님의 이런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인각 스님은 설명한다.
또한 이런 전통 때문에 금어선원의 청규(淸規)는 엄하기로 소문나 있다.
안거 중의 산문 밖 출입은 당연히 금지되고 죽비에 의지한 채 묵언한다.
수좌들은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밤 10시에 잠들 때까지 하루 12시간 이상 정진한다.
대부분의 선원에서 50분 좌선한 뒤 10분간 다리쉼을 위해 일제히 포행(布行)하지만 금어선원에서는 원하는 사람만 포행하고 나머지는 계속 정진한다.
또 음력 12월1∼8일에는 눕지도 자지도 않고 용맹정진한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이룬 성도절(12월8일)을 맞아 부처님처럼 용맹스럽게 정진하자는 뜻에서다.
하루 세 끼는 발우공양을 하며 점심 때에는 가사 장삼을 다 갖춰 입은 채 공양에 참여한다.
수좌들이 정진 방법과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율 정진도 일절 없다.
지난 81년에는 평생 동안 바깥 출입을 않고 정진하는 종신수도원을 개설해 9명의 스님이 공부한 적도 있다.
그야말로 화두 하나에 모든 걸 걸고 사는 삶이다.
이번 동안거에 참여한 스님은 모두 27명.50년 이상 정진한 원로에서부터 선방 경력 5년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좌들이 모였다.
선방의 수용 한계 때문에 방부를 모두 받지 못하는 실정이라 입방(入房) 심사가 불가피하다.
인각 스님은 "기준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정진 잘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다.
인각 스님은 올해 동안거에 즈음해 1백년 역사의 금어선원에 사상 처음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허용했다.
불교계와 일반 언론의 동안거 취재를 허락한 것.스님은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 시대에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아울러 "참선 공부엔 출가·재가가 따로 없다"며 "대의지하 필유대오(大疑之下 必有大悟·크게 의심하면 반드시 크게 깨달음)"라고 강조했다.
선법(禪法)은 필기도구도 공책도 필요 없는 공부이므로 마음 있는 이는 누구나 하면 된다는 것.간절하게 발심해 마음으로 공부하면 반드시 견성(見性)한다는 얘기다.
이번 동안거에는 금어선원 외에 대성암에 비구니 45명,재가선원에 여성 신도 55명이 동참하고 있다.
동안거가 시작되는 날 범어사 조실 지유 스님은 이들에게 "내 부모를 죽인 원수를 갚겠다는 독한 마음으로 분심(憤心)을 내어 공부해야 선은 드러난다"며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찾는 지극한 마음을 가지라"고 했다.
금어선원 뒤편의 대숲에 바람이 인다.
동산 스님이 1927년 하안거를 마치고 댓잎 소리에 마음이 열렸던 그 대숲이다.
모든 것이 머무름 없이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은 그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지극한 무엇을 찾는 나는 누구인가.
대숲은 대답 대신 서걱대기만 한다.
부산=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