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K부사장은 미국 출장 때마다 지방의 소도시 한곳을 꼭 들른다.
비즈니스가 있는것도,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국내선을 갈아타야 하는 불편을 감내하면서 그는 굳이 그곳을 찾아간다.
S급 인재로 분류되는 R씨를 영입하기 위해서다.
R씨는 지금껏 삼성전자가 외부에서 스카웃한 S급 인재와 비교해 결코 손색이 없는 IT업계의 거물급 인재.현지 엔지니어들에게도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K부사장이 R씨를 처음 방문한 것은 지난 4월.회사내 글로벌 채용팀의 보고를 받고 뉴욕 출장길에 그를 찾았다.
첫 만남인 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스카우트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대신 "지금 당신이 다니고 있는 회사는 5년,10년 후를 대비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느냐"는 등의 질문만 던졌다.
R씨는 즉답을 피한 채 IT업계의 동향과 한국 전자업체들의 약진에 대한 얘기로 화제를 돌렸으며 K부사장은 그에 맞춰 삼성전자의 사업전개 상황과 미래의 비전을 소상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상견례를 마쳤다.
K부사장은 다음날 그를 다시 방문했다.
전날 속내를 약간 비친 터라 거두절미하고 스카우트 의사를 밝혔다.
세계 최고 수준의 대우에 다섯 가족이 기거할 수 있는 1백평짜리 아파트를 제공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하지만 대답은 'No'."그렇지 않아도 전날 밤 아내에게 삼성에서 사람이 왔다고 했더니 친지도,친구도 없는 한국에 가서 살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는 것.K부사장은 "당신의 사정을 잘 알겠다.하지만 학술회의차 한국이나 일본에 올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연락해 달라.스카우트를 떠나 동종업계의 친구로 사귀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발길을 돌렸다.
K부사장은 그 뒤 수 차례 R씨를 찾았지만 아직까지 그를 영입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에 미국에 가면 또 그를 방문할 계획이란다.
삼성이 S급 인재를 끌어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삼성은 올해 S,A,H급으로 분류되는 핵심 인재들을 스카우트하는 데 무려 90억원이라는 경비를 들여야 했다.
미국 유럽 중국 인도 등에 마련된 글로벌 채용거점(IRO:International Recruiting Office) 운영비를 제외해도 막대한 리크루트 비용을 투입한 셈이다.
물론 돈을 많이 들여 뛰어난 인재를 데려올 수 있다면 큰 고민이 아니다.
문제는 R씨의 경우처럼 한국에서의 생활 문제,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적응,가족들의 반대 등이 오히려 더 큰 걸림돌이 될 때가 많다.
삼성은 이 때문에 스카우트 대상자의 가족들에게도 세심한 배려를 한다.
좋은 관광상품을 만들어 서울과 제주도 등으로 가족 동반 여행을 시켜주고 한국의 전통문화를 소개하는 책자를 정기적으로 보내준다.
자녀를 위해 외국인 학교를 알선해주는 것은 기본이다.
삼성전자가 지난 7월 S급 인재로 채용한 L씨는 무려 7년이나 공을 들여 영입한 케이스다.
L씨는 미국에서 학부를 마치고 석사를 거쳐 J사의 아·태지역 마케팅 담당 부사장을 맡았던 인물.1963년생인 점을 감안하면 그는 34살 때부터 삼성에서 강력한 러브콜을 받아온 셈이다.
삼성은 7년간 공을 들여 영입해 놓고도 그를 즉각 현업에 배치하지 않았다.
업무 흐름을 익히며 나름대로 조직문화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겠다는 배려에 따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K부사장이 R씨에 대한 욕심을 접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그는 "앞으로 3년이든,5년이든 기다릴 것"이라며 "혹시 도중에 내가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후임자가 다시 그와 접촉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