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진숙 작가정신 대표ㆍ시인 jakka@unitel.co.kr > 사무실 안에 있는 화분에 물을 주고 오랜만에 베란다를 물청소하던 나는 놀랍고도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내버려둔 행운목 화분 안에서 초록색 잎이 손가락 만하게 올라와 있어서였다. 그 큰 행운목은 죽었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다. 몇 년 전 사무실 이전 때 지인으로부터 받았는데 너무 커서 분갈이를 했었다. 죽은 줄기를 잘라내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껍질이 벗겨지고 썩기 시작했다. 한동안 애써 보살폈던 나는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말라비틀어져서 죽었다고 생각한 베고니아를 혹시나 해서 아침마다 물을 주고 그늘에서 햇빛을 보게 했더니 나날이 앙징맞은 꽃잎들이 얼굴을 내밀어 나무나 꽃은 사람의 관심을 먹고 사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나는 그보다 더한 애착을 갖고 정성을 기울였는데 방법이 틀렸는지 그만 죽어버렸던 것이다. 보기에도 흉해 뽑아버리려고 했는데 얼마나 무거운지 뽑혀지지가 않았고,할 수 없이 베란다에 내놓고는 잊어버렸었다. 그게 이른 봄이었으니 8개월쯤 전의 일이다. 그나마 눈길을 준 것도 보기싫게 썩은 형상이 마음에 걸려서 어떻게 그 화분을 치울 수 없을까 해서였는데 이파리가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두 개였다. 베고니아를 보고 받았던 경이로움과는 비교도 안되게 강렬한 기쁨이 밀려왔다. 생명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알고 있거나 알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있는 그 무엇이었다. 분갈이를 했을 때 작은 것은 살아서 고물고물 이파리가 돋았고 지금은 제법 행운목의 위상을 갖추고 있다. 나는 베란다에서 화분을 다시 들여왔다. 날씨가 추워져 곧 영하로 떨어질 것 같아서였다. 두 화분을 마주 세워 놓으니 마치 부활한 세 마리 작은 새 같았다. 한 나무에서 갈라져 나와 어느 것은 죽고 어느 것은 산다. 죽은 자리는 상처처럼 아물고 새로운 자리에서 새싹이 돋는다. 그러니 죽었다고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 있다고 해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법칙이다. 생명의 순환인 것이다. 지난 4일 수덕사에서 숭산 스님 다비식이 있었다. 생전에 많은 국내외 중생들을 감화시키고 스님도 자연으로 돌아갔다. 스님이 떠난 그 자리는 아물고 세계를 굴리는 법륜의 또다른 가지에서 숭산 스님은 다른 새 잎으로 돋아나고 자랄 것이다. 그것은 불교만의 이치도 아니다. 만물은 끊임없이 생멸하는데 그 모양이 바통을 주고받으며 연이어 달리는 릴레이와도 닮아서 이 생명이 다하면 저 생명이,저 생명이 다하면 또 다른 생명이 한 세상을 살기 마련인 것이다. 사람도 제 자식에게 그렇게 바통을 넘겨주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