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脫샐러리맨 창업기] 맥주전문점 '와바' 발산점 최한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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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맥주전문점 '와바'발산점을 운영하는 최한문씨(31).
그는 작년 10월까지만 해도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만 1년이 지난 지금 그는 엄청나게 변한 자신을 발견하곤한다.
5년간 머물렀던 직장생활의 잔영은 낮과 밤이 바뀐 1년여의 생활속에 말끔히 사라지고 말았다.
아침 9시에 출근해 저녁 8시에 퇴근하던 일상은 오후 5시 출근, 오전 4시 퇴근으로 뒤바뀌었다.
밤 12시에 청하던 수면은 아침 5시로 변했다.
그리고 오후 1시쯤 피곤에 절어 일어난다.
그래도 마음이 항상 가볍다.
요즘처럼 지독한 불황에도 하루 매출이 1백50만원 이상 일어나기 때문이다.
일요일이 없어도 누구에게 불평할 수 없다.
자기 사업인 까닭이다.
머리를 굴린 만큼,몸을 움직인 만큼 수입은 더 들어왔다.
1년 고생한 끝에 55평 남짓한 가게에서 월 4천만원 매출,순이익 1천만원은 올리기 때문에 그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1년 전을 돌이켜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장사라고는 난생 처음이라 완전히 백지상태에서 시작했다.
"작년 12월12일 가게를 오픈했는데요,맥주집을 겨울에 연다는 게 거의 자살행위에 가까운 것인줄 나중에 알았습니다.
첫 달에는 '오픈발'로 버텼는데 1월부터 매출이 뚝 떨어져 가슴을 졸였지요."
매출 부진은 1월 한 달로 끝나지 않았다.
하루 평균 1백50만원을 오르내리던 매출이 1월 들면서 1백만원 수준으로 30% 이상 떨어졌다.
3월 말까지 석 달간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래도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엎지른 물이었다.
다행히 4월 들면서 봄볕처럼 매출이 뜨기 시작했다.
최씨는 99년 가을 한 제강업체에 입사,철판 기술영업을 맡았다.
흔한 물건이 아니고 건설업체를 상대로 한 영업이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처음에는 임원까지는 올라가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1∼2년 지나면서 금방 회의가 들었다.
과장 부장 등 상사들의 사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정된 시간에 삶을 업그레이드하려면 뭔가 결단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이런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데 결혼은 하나의 촉진제 역할을 했다.
"직장생활을 오래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뒤 맨 처음 착수한 것은 투잡스 계획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정보기술(IT)이 뛰어난 처남과 인터넷 쇼핑몰 소호 창업을 추진했죠." 하지만 일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두 가지 일을 병행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2003년 봄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내 사업·내 점포를 가져야겠다는 결심이었다.
첫 단계는 아이템 선정.무슨 장사를 할까 하는 문제였다.
음식점은 일단 제외했다.
음식 관리와 뒷정리가 힘든 데다 경쟁이 치열해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이왕이면 깔끔하고 경쟁이 덜 치열한 아이템을 택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인터넷이나 대중 매체를 통해 물색한 10여개 베이커리와 맥주점 브랜드를 놓고 검토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이들 브랜드로 장사하는 가맹점 수십 군데를 찾아 탐문 조사에 들어갔다.
인테리어나 시스템이 너무 뻔해 눈길을 끌 수 없는 곳은 일단 제외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최종 선정한 게 세계맥주전문점.수백 가지 수입 맥주를 매장 안에 진열해 놓는 독특한 인테리어에 마음이 끌렸다.
"아이템을 고르고 난 뒤 점포를 물색하는 데 4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서울 신설동 신사동 상계동 서초동 잠실 등 수십 군데를 돌아 다닌 끝에 발산동에다 가게를 잡았습니다.
입지가 좋은 데 비해 권리금이 한 푼도 없어 투자비를 줄일 수 있는 이점이 있었죠."
2003년 10월 사표를 내고 두 달간 점포 오픈 작업에 매달렸다.
보증금을 빼고도 1억5천만원이 더 필요했다.
집을 담보 잡혀 대출을 받았다.
적금도 깼다.
그래도 모자라는 돈은 친지들에게 빌렸다.
당시로는 도박을 한 셈이다.
그러나 지금 최씨는 행복감에 젖어 있다.
땀 흘린 만큼,가슴 졸인만큼 대가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본사 1588-0581(www.wa-bar.co.kr)
강창동 유통전문기자 cd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