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영'을 표방하던 대우그룹이 '분식회계'라는 고름이 순식간에 터지면서 허망하게 무너진지 어느덧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지난 99년 대우 5개 계열사가 무려 41조라는 초대형 분식회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세상밖으로 드러나면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훌쩍 해외로 떠나버렸고 대우그룹 사장들은 줄줄이 재판정에 섰다. 남겨진 국내·외 25만 대우인들은 싸늘한 여론을 견뎌내며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와야만 했다. 분식회계 등을 통한 방만한 경영의 결과는 전 계열사로 번져 당시 총 34개에 달했던 대우그룹의 계열사 중 워크아웃에 들어갔던 12개사를 제외한 나머지 22개사는 계열 분리를 통해 독자 법인이 됐거나, 청산 혹은 대우 관련사에 흡수 합병됐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대우인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분식회계'는 상상조차 못 했던 일반 직원들과 생산직 근로자들은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거리로 내몰렸다.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던 대기업 직원들이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지금은 조그마한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대우맨 김 모씨(56세)는 최근 조세일보 기자와 만나 "당시만 해도 대기업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김씨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떠 보니 '실업자'가 돼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거 하고 싶었던 사업이나 하자며 친구랑 의기투합했는데 6개월만에 퇴직금 다 날려버리고 집 담보대출까지 털어넣고... 결국엔 딸 아이 대학 등록금마저 없어 여기저기 손 벌리는 지경까지 갔지. 아직도 그 빚을 다 청산하지 못하고 깔고 있어" 김씨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는 담배를 한 대 피워 물며 "그나마 나는 작은 사업체라도 꾸려나가고 있으니 나은 편이야. 퇴직금 다 날리고 가족이 뿔뿔이 헤어진 친구도 있고 재기를 하지 못해 이혼 당한 친구도 있고... 불과 5년전만해도 주위에서 부러워하는 잘 나가는 대기업 사원이었는데, 거 참"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상 초유의 분식회계 사태로 상처를 입은 대우맨들은 5년이 지난 지금도 미처 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안고 있지만, 정작 분식회계를 지시하고 가담했던 김 전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은 속속 재기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김 전 회장은 여전히 해외를 전전하고 있지만 최근의 정치경제 환경 변화와 함께 대우건설을 비롯한 대우 계열사들이 재기에 성공, 정상화되면서 정치권 일각에서 '귀국론'이 조심스레 흘러나오고 있다. 또 지난 97년 이후 3년간 김우중 전 회장의 지시로 수출대금조작 등을 통해 41조1000억원을 분식회계 처리한 혐의로 기소됐던 그룹전직 임원 11명은 지난 2002년 1월 대부분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으며 상당수가 특별사면으로 자유의 몸이 됐다. 특히 지난 2002년 12월말 사면된 추호석 전 대우중공업 사장과 신영균 전 대우조선 사장, 전주범 전 대우전자 사장 등은 경영일선에 복귀해 제2의 인생을 시작했지만 '세계경영' 최일선에 섰던 화려한 과거에 비하면 미흡하다. 전주범 전 사장은 지난 7월 영산대 대외부총장에 영입돼 기업의 전문경영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대학운영에 참여하게 됐다. 신영균 전 사장도 지난 2002년 9월 동부한농화학 사장으로 영입돼 얼마 전에는 동부그룹 화학부문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추호석 전 사장은 검색엔진 전문 회사 '코리아와이즈넛'을 경영하다가 올해 초 파라다이스(외국인전용 카지노 기업) 사장으로 영입됐다. 이처럼 특별사면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한 임원들이 있는가 하면 대우 강병호 전 사장 등 일부는 검찰이 상고를 제기하고 취하해주지 않은 바람에 사면에서 제외돼 여전히 형집행을 받고 있다. 강병호 전 사장은 법정구속 없이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며 김태구 전 사장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대우 이상훈 전 전무와 대우 장병주 전 사장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밖에 대우 정주호 전 사장과 대우 이경훈 전 사장이 각각 명지대와 서울대 초빙교수로 위촉돼 후배양성에 힘쓰고 있다. 또 과거 대우의 '탱크주의' 광고모델로 유명했던 대우전자 배순훈 전 사장은 98년 정보통신부장관을 거쳐 현재 KAIST 교수를 지내고 있다. 한편 대우의 추락과 함께 공중분해 된 산동회계법인의 700여명 직원(회계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 파트너들은 아직까지 대우 분식회계와 관련 민·형사 재판을 받고 있다. 조세일보 / 주효영 기자 fatum@jose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