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석자 ] 배현기 하나경제연 조사팀장 김기형 한국신용정보 평가1실장 명한석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 유진학 프랑스 수출보험공사 지사장 김국환 한미에셋 대표 -------------------------------------------------------------- 386이라고 하지만 실은 40세 전후들이다. 그들은 80년대 학번이며 그래서 인생의 가장 예민한 시기에 온몸으로 모순을 껴안고 살아왔다. 앨프리드 마셜이 말한 '냉철한 머리(cool head)와 따뜻한 가슴(warm heart)'을 영문으로 새겨넣은 티셔츠를 입고 학교를 다녔다. 세월의 물결을 타고 이제 어쩔 수 없이 '486'이 되고 만 그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연말 망년회를 겸해 서울대 경제학과 84학번 동기생 몇명이 서울 을지로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전두환 정부가 학원자유화 조치를 단행한 바로 그 해에 입학했으니 꼭 20년이 지났다. 어느덧 불혹(不惑·40세)의 나이. 학생운동을 하다가 직장에 들어갔던 친구는 변호사로 변신해 있었고,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리스회사에서 근무하던 친구는 외국회사 지사장이 돼서 나타났다. 졸업후 줄곧 한 직장에서만 근무해온 친구도 있고,경제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경제연구소와 기획예산처를 거친 이코노미스트도 나왔다. 오랜만에 소주 한잔 하면서 경제 돌아가는 얘기나 해보자는 가벼운 모임이었다. 모두가 자신들이 이 시대에 유달리 주목받는 세대라는 것을 잘알고 있었다. 류진학 프랑스수출보험공사(Coface) 한국 지사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항세력으로서 386의 역할은 어느 정도 끝났다고 봐.세상이 바뀌었으니까.새로운 시대의 전문가들에게 맡겨두는 열린 자세가 필요해." 정계로 진출한 386 동년배들에게 좀더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봐달라는 주문이었다. 김기형 한국신용정보 ABS(자산담보부증권)평가1실장이 호응했다. "개혁성과 의지는 높이 살만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게 문제야.윗세대로부터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법들을 배울 필요가 있어." "맞아,열정은 존중하지만 위상에 걸맞은 전문성과 역량을 가졌으면 해." 다른 친구가 맞장구를 쳤다. # 성장.분배 함께 챙겨야 그러나 '성장 일변도 정책'에 대해서는 386세대답게(?) 거부감도 많았다. 명한석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는 "중산층의 구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성장동력이 떨어질 수도 있어.분배 문제에도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어?"라고 말했다. 앞서의 김 실장 역시 "성장과 분배 모두 포기할 수는 없지.사회안전망을 통해서 기본적인 것들은 좀더 채워나가야겠지"라며 분배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들은 386세대를 한 묶음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연령층으로 나눠 정체성을 따진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비판하거나 칭찬하는 것 모두에 조심스러워했다. 얘기는 자연스럽게 최근의 경제 이슈들로 흘러갔다. 술잔이 돌아가는 횟수 만큼이나 탁자위로 걱정들도 쌓여갔다. 배현기 하나경제연구소 금융조사팀장이 최근의 불경기 문제를 놓고 먼저 입을 뗐다. "가장 큰 문제는 기업들이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거야.삼성이나 SK 같은 큰 기업들은 공정거래법을 걱정하고 있어.10년 뒤를 내다보고 투자를 해야 하는데 당장 기업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투자를 안해."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다들 나름의 일가견을 갖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평소에 말이 적은 명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경기를 살리려고 신용카드 촉진책을 썼는데 부작용만 양산했단 말이야.지금은 건설경기밖에 없어.나는 SOC(사회간접자본)쪽에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봐.IT(정보기술)산업이 발전한 것도 통신망을 미친듯이 깔았기 때문이잖아.그때는 무모해 보였지만." 갖가지 SOC 대안들이 쏟아졌다. 수질오염이나 대기오염을 줄이고 녹지를 조성하는 등의 사업들도 제시됐다. 그러나 연기금을 동원해 SOC투자를 늘리겠다는 정부의 발상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반대했다. 국가 사업은 국채를 발행해 투자하는 정공법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국환 한미에셋 대표가 기업을 둘러싼 조세환경으로 화제를 바꿨다. 정부에 대한 불만이었다. "두명이 일하는 법인은 탈세하기가 매우 어렵고 다섯명이 일하는 자영업자는 탈세하기가 매우 쉽게 돼 있다구.그러니 사람들이 자영업을 하지.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 SOC, 국채발행 정공법 써야 한국에서 유독 자영업자들이 많은 이유가 조세체계에 있었다니….돈을 벌려면 탈세를 해야 하고,탈세를 하기 위해서는 법인 형태의 기업을 운영하는 것보다 자영업을 하는 게 더 유리하다는 얘기였다. 음식점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주 두병이 또 들어왔다. 서로 빈 술잔을 채웠다. 배 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중소기업들에 대해서는 은행들이 어떤 형태로든 해결책을 찾을 거야.그러나 자영업자는 대책이 없어.구조조정이 안돼.5억원을 빌린 목욕탕이 장사가 안된다면 대책이 뭐가 있겠어.정부가 중소기업에 초점을 맞춘 대책을 내놓고 있는데 현실을 잘 모르는 것 같아." 불경기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계층이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라는 점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문제 해결방법에는 약간씩 차이가 났다. 김국환 대표는 매출액만큼 부채를 갖고 있는 중소기업들이 장부에 기재하지 않은 부채 때문에 기업인수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회피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경기 문제를 좀더 새로운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어.소비부진으로 장사가 잘 안되는 것은 자영업과 중소기업이야.앞으로 실업자들이 더 늘어나게 되고 이들이 장사를 시작하기 때문에 자영업자들은 계속 늘어날거야.자영업자들은 사업타당성 분석도 안해." # 자영업자 증가 대책 필요 명 변호사는 부실 중소기업 회생을 맡고 있는 법정관리인 제도를 꼬집었다. "법정관리인의 상당수가 무능할 뿐만 아니라 자리를 계속 지키기 위해 기업회생을 오히려 지연시키는 도덕적해이 문제를 안고 있어.해결이 안돼." 그는 중소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내에 최고경영자(CEO) 시장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서만 너무 많은 얘기를 했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희망론도 나오기 시작했다. 유진학 지사장은 "나는 대기업이나 은행,외국계 기업들을 상대로 영업하고 있는데 이런 기업들은 괜찮다"며 "롤러코스터형 경기순환에 크게 영향받지 않고 이익을 꾸준히 내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에 국내 기업들도 이제 눈을 떠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기형 실장은 "국내기업들은 확실히 많이 바뀌었어.일본사람들도 한국기업들의 재무제표 슬림화에 대해 많이 얘기해"라며 맞장구를 쳤다. 명 변호사는 "우리 사회는 그래도 많이 발전했어.기업들도 투명하게 경영하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지.글로벌 스탠더드는 사실 웃기는 얘기야.미국의 엔론이나 월드콤 같은 기업들을 봐.우리 기업들보다 더 악질이었잖아.외환위기 와중에 이만큼 왔고 제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라고 봐"라고 말했다. 그는 "기업들은 그래도 희망이 있어"라고 덧붙였다. 밤이 늦어지며 친구들은 2차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리=현승윤 기자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