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분식 면죄부' 물건너가나] "기업소송 천국서 사업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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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주주 집단을 대표하는 소액주주 한 사람이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승소할 경우 소송에 동의한 다른 주주들도 함께 배상을 받도록 하는 증권집단소송제가 당초 안대로 내년부터 시행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재계에 초비상이 걸렸다.
기업들은 "집단소송이 봇물을 이뤄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상황을 최악으로 몰아가는 사태를 막기 위해 과거 분식회계에 대해선 면죄부를 주거나 유예해줘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묵살당하자 '기업 과거사 규명이 본격화되는 것 아니냐'며 바짝 긴장하고 있다.
전경련은 27일 열리는 국회 법사위에 한가닥 희망을 품고 있으나 여야 정치권의 시각차이와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와 같은 정치현안들에 밀려 외면당하는 분위기여서 '막판 수정'에 대한 기대가 무너져가는 양상이다.
특히 열린우리당의 일부 강경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원안 후퇴=개혁 후퇴'라는 기류가 강하게 형성되고 있는 데다 여야 정치인들이 찬반태도 표명에 따른 정치적인 이해득실을 따지느라 기업들의 절박한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다.
이로 인해 한때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원회 등을 중심으로 제시되었던 '과거 분식회계 해소를 위해 향후 3년간 법 적용을 유예한다'는 내용의 수정안은 묻혀버린 상태다.
재계는 증권 집단소송법이 내년 1월부터 그대로 시행될 경우 가뜩이나 경제환경이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소액주주들에 의한 소송 남발 등으로 큰 곤욕을 치를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 "늘어나는 주가관리비용 등으로 증시에 대한 매력을 잃어가고 있는 상장회사들이 내년부터 소액주주들의 줄소송에까지 시달릴 경우 상장폐지를 추진하는 기업들이 속출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우려했다.
증시관계자들은 "자산 2조원 이상인 상장·등록기업 80여개로 한정되기 때문에 당장 파장은 제한적으로 나타나겠지만 장기적으로 집단소송제가 활성화될 경우 증시는 연중 '악재'에 시달릴 수 있다"면서 "벤처와 코스닥을 살려 장기불황을 돌파하겠다는 정부정책과도 상충된다"면서 납득하기 힘들다는 표정이다.
기업` 회계 측면에서도 문제가 적지 않다.
한 회계법인 관계자는 "기업회계는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과거 분식을 특정시점에 일시에 해소하기란 불가능하다"면서 "기업들이 털고 갈 시간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대법원도 집단소송제 시행에 따른 소송 봇물을 우려한 나머지 원고가 소송비용을 미납할 경우 소송을 종료하도록 하는 등 '남발 방지책'을 내놓았지만 기술적인 조치일 뿐 집단소송의 부작용을 막기엔 역부족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하고 있다.
미국 AIG금융그룹을 비롯 한국에 투자를 많이 하는 외국인들의 시선도 곱지 않다, 이들은 "앞서 도입한 미국도 크게 후회하고 있는 판국에 한국이 이를 확대 도입하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들이다.
이에 따라 내년에 외국인투자자들이 많이 들어온 기업들에 대해 국내 소액주주들의 집단소송이 늘어날 경우 외국인투자자들이 '셀 코리아'로 돌아서는 부작용도 우려된다고 증시 관계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특히 기업들은 일정한 유예기간을 적용해 준다고 하더라도 민·형사상 책임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유예보다는 과거분식에 대한 면죄부'를 희망했으나 '유예'마저 물건너가는 분위기에 크게 실망하고 있다.
재계는 민·형사상 책임문제가 대두될 경우 △지난 97년 외환위기 이후 유난히 자주 바뀌었던 회계기준과의 일치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고 △상시 구조조정으로 관련 책임자들의 범위를 설정하기 어려운 점 등을 들어 제도 시행에 심각한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분식회계 자체에 대한 범위도 애매한 점이 많다는 지적이다.
금융감독원이 지난 6월 분식회계를 '회계처리기준 위반행위'로 명칭을 변경했으나 여전히 개념이 포괄적이고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조일훈·김수언·주용석 기자 jih@hankyung.com
< 집단소송제란 >
기업의 분식회계,허위공시,주가조작,내부자거래 등으로 인해 발생한 소액주주들의 피해를 효율적으로 구제한다는 취지로 내년 1월 1일부터 도입되는 제도다.
일정한 요건을 갖춘 소액주주가 피해자 집단을 구성한뒤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배상판결을 받으면 다른 구성원들도 판결의 효력을 그대로 인정받게 된다.
소송은 피해집단 구성원이 50명 이상이고 보유주식 지분율이 1만분의 1(0.01%) 이상이어야 제기할 수 있다.
상장·등록기업 중 자산규모가 2조원 이상인 기업은 내년부터 집단소송의 대상이 되고 2조원 미만 기업은 2007년부터 적용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