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의 파산규모 655억달러라는 역사적 오명을 남긴 미국 엔론(Enron)사의 분식회계 사태가 터진지 3년이 훌쩍 넘었다. 9.11 테러 공격이 미국 대외 정책 구도에 변화를 초래했다면 엔론의 분식회계 파장은 미국 경영·경제 시스템의 총체적인 변화와 더불어 경제적 위기를 가지고 왔다. 사상 초유의 분식회계 사태는 엔로니티스(Enronitis)라는 신조어까지 남겼다. 엔로니티스는 'Enron as it is(엔론과 같은)'를 한 단어로 축약한 것으로, 엔론 파산이후 재무구조가 부실하거나 분식회계 의혹에 휩싸여 있는 기업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신조어가 등장하게 된 것은 제 2·3의 엔론이라 불리며 2002년 들어서 20여개의 미국 대표기업들의 분식회계 스캔들이 불거지면서이다. 마치 엔론이 신호탄이었던 것처럼 곧이어 엔론의 분식규모 5억9000억달러를 갱신한 38억 달러규모의 분식회계가 미국 2위 통신업체인 월드컴(MCI이로 개명)에서 불거졌고, 제록스 역시 사상 최대의 60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과대계상 한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GM도 분식회계 의혹으로 증권거래가 일시 중단됐었다. 연이어진 기업들의 분식회계는 그 방법도 장부조작, 내부자 거래, 탈세에 이르기까지 온갖 다양한 형태를 보여줘 미국 경제는 그야말로 '분식회계 백화점'을 방불케 했다. 미국은 분식회계 여파를 최소화하고 다시 한번 회계시장의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보다 강력하고 엄격한 회계기준법인 '사베인즈·옥슬리법'을 제정하고, 분식회계 주도자들에 대한 사법처리를 위해 발빠르게 움직였다. 지난해 미 증권 거래위원회(SEC)는 세계적인 복사기업체인 제록스의 분식회계 사건에서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이 회사의 최고재무책임자였던 배리 로메릴에게 회계업무에 영구히 종사할 수 없도록 하는 중징계를 내리는 한편, 회계담당국장이었던 그레고리 테일러에 대해서도 회계업무 종사권한을 3년간 정지시키는 등 강경 조치를 내렸다. 또 월드컴의 창업자이자 당시 최고경영자인 버나스 에버스 역시 구속 기소돼 스스로 일군 회사를 떠나게 됐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7월 9일 엔론의 케네스 레이 회장이 엔론이 파산보호신청을 한지 2년 8개월만에 구속됐다. '기업은 망해도 경영자는 돈을 번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2001년 파산신청 직전에 엔론주식 1억달러어치를 시장과 회사측에 매각했던 레이 회장의 구속은 경제적, 정신적 피해를 안고 살아가는 수만명의 종업원과 주식투자자들에게 작은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이와 함께 외부감사인으로서 분식회계를 방조한 회계법인들 역시 각종 소송의 회오리에 휘말려 법의 심판을 받았다. 특히 89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회계법인인 아더앤더슨도 문서를 파기하면서까지 엔론과 글로벌크로싱의 분식회계를 눈감아 준 사실이 드러나 결국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다. 법정으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은 아더앤더슨은 엔론의 주주들과 채권단으로부터 줄줄이 소송을 당하면서 사면초가에 놓였다. 마침내 스스로 2002년 8월 31일 상장기업의 회계감사업무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아더앤더슨은 비즈니스컨설팅 사업을 KPMG에 넘김으로서 회계역사에서 쓸쓸히 퇴장했다. 세계적인 회계법인인 KPMG은 제록스의 회계 부정을 방관한 혐의로 지난해 SEC로부터 민사소송을 당했다. 제소 대상은 제록스 회계감독 업무를 책임졌던 KPMG 간부 마이클 콘웨이와 전·현직 파트너 4명. SEC는 또 KMPG가 제록스로부터 받은 수수료를 모두 반환토록 요청하고 벌금부과도 추진키로 하는 등 강력하게 대응하고 있다. 글로벌 스탠더드의 중심이며, SEC(미국 증권거래위원회)의 강력한 분식회계 기소권한으로 회계부정 없이 투명한 기업경영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인식됐던 나라 미국. 그런 나라의 분식회계 스캔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월스트리트뿐 아니라 세계 증시까지 흔들렸다. 기업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가 바닥까지 추락했으며, 미 증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길고도 깊은 하락을 경험해야 했다. 10여 년간 장기호황을 자랑하던 미국경제가 분식회계에 발목을 잡혀 추락의 길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미국경제에 대한 신뢰저하로 약세 기조를 보이고 있던 달러화가 추가로 하락하고, 각국의 증시 불안이 심화되고 있다.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화의 신뢰성에 기반을 둔 국제금융질서가 무너지면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경제의 수출 주도형 성장시대가 끝나는 것이 아니냐는 위기감도 고조시키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도 연일 최저·최고를 갱신하는 경제지표들로 인해 큰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엔론 사태 후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분식회계의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다. 마치 바다에 한번 유출된 기름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시간이 필요하듯 엔론이 세계경제의 '바다'에 유출시킨 분식회계 '기름'은 여전히 바다 위를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조세일보 / 신화준 기자 hwajune@jose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