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제2대 수반에 당선된 마흐무드 압바스(69)는 (故)야세르 아라파트 초대 수반과 함께 혁명 1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압바스는 40년간 아라파트의 2인자 역할에 머물며 각광을 받지 못했으나 지난해11월 아라파트의 병사(病死)로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 권토중래했다. 압바스는 부패와 무능의 대명사인 구세대 지도자인데다 아라파트가 누렸던 대중적 카리스마가 없어 범민족 지도자로선 부적격하다는 평이 줄곧 따라다녔다. 더욱이 그는 2003년 4월 자치정부 초대 총리로 임명됐다가 아라파트의 잦은 불화로 4개월여만에 중도 하차한 전력이 있다. 압바스는 그러나 아라파트 사망 직후 구세대의 퇴장과 신진 개혁세대의 등장을요구하는 시대의 흐름을 잘 읽었다. 대중 앞에서는 아라파트의 혁명 유업을 받들겠다고 약속하면서 이스라엘과 미국에는 대화 신호를 꾸준히 보냈다. 그는 아라파트사망 후 2개월간 신ㆍ구 세력과 보ㆍ혁 세력을 아우르는데 가장 역점을 두었다. 압바스는 파타운동의 수반 후보로 지명됐고, 2주일간의 선거유세를 통해 승리기반을 다진뒤 마침내 당선됐다. 그는 선거로 뽑힌 두번째 팔레스타인 최고 지도자다. 압바스는 1950년대 아라파트와 함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창설하고, 1965년에는 파타운동을 결성하는 등 항상 아라파트와 정치적 행보를 함께 했다. 1993년에는 아라파트와 함께 오슬로 평화협정 조인식에도 참가했다. 팔레스타인 역사에서 아라파트를 떠난 압바스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여러면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우선 미국과 이스라엘의 눈에 비친 두 지도자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아라파트가 폭력수단을 이용한 팔레스타인 독립투쟁을 추구했다고 비판했다. 이 때문에 아라파트는 말년에 미국과 이스라엘로부터 따돌림 받고정치적으로도 사망선고를 받았다. 반면 압바스는 대화가 가능한 실용주의 지도자라는 평을 받아왔다. 이스라엘 내부에는 이같은 평가를 경계하는 반대론도 있지만 아리엘 샤론 총리는 압바스의 당선을 음으로 지원해온 게 사실이다. 압바스는 실제로 "힘의 균형이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력으로 팔레스타인을 해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평화가 유일한 선택이며무장투쟁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는 소신을 누차 밝혔다. 아라파트는 대중 앞에 나서 강경구호를 외치고 지지를 확인하길 좋아하는 지도자였다. 이에 반해 압바스는 대중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왔다. 그가 대중의 힘을 피부로느끼고 자신이 더이상 2인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것도 이번 유세기간이었다. 아라파트는 트레이드마크인 올리브색 군복 차림에 카비야를 항상 두르고 다녔지만 단정한 양복 차림에 안경을 쓴 압바스는 관리나 비즈니스맨의 인상을 풍기고 있다. 저명한 팔레스타인 학자 마흐디 함디의 말대로 압바스는 "한번도 총을 들어본적이 없으며, 전투에 참여한 적도 없고, 선거에 나서 본 적도 없는" 지도자다. 항상 무뚝뚝하고 퉁명스런 표정인 그는 한번 협상에 임하면 끝을 봐야 하는 저돌적 협상가로 유명하다. 압바스는 1935년 영국 위임통치를 받던 팔레스타인의 사페드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1948년 이스라엘 건국후 고향이 이스라엘 땅에 편입되자 압바스 가족은 시리아로 쫓겨났다. 압바스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와 정치를 공부한 몇 안되는 팔레스타인인들 가운데 한명이다. 그는 이집트에서도법학을 공부하고 모스크바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학구파 정치인이다. 압바스는 이제 아라파트 신화를 벗기고 팔레스타인을 국제사회의 정상적인 독립국가로 이끄는 역사적 책임을 떠맡게 됐다. (카이로=연합뉴스) 정광훈 특파원 barak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