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06.04.02 17:19
수정2006.04.02 17:22
'어느 날 밤 11시까지 스케이트를 타다가 귀가하는데 귀가 얼어 딱딱해졌다.하숙집 할머니가 김칫국에 담그면 얼음이 빠진다고 하며 얼음이 버적버적 하는 동치미 한 사발을 주어서 거기에 귀를 몇 시간 담그고 있었더니 정말 얼음이 빠졌다.'
김칫국뿐이었으랴.배가 고프진 않은지,귀가 잘 녹는지도 묻고 살폈을 것이다.
예전의 하숙집에선 이렇게 한밤중까지 놀다 온 하숙생도 챙겼다.
겉으론 식사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밥을 안주겠다고 싫은 소리를 해도 막상 늦게 일어나거나 밤늦게 들어와 부엌을 기웃거리면 시장한가보다 싶어 밥상을 차려줬다.
얼굴색이 안좋으면 아픈지 묻고,새 사람을 맞는 입방식을 치른다며 밤새 소주파티를 벌이면 김치 안주라도 내주고,친구를 데려와 아침밥상에 앉히면 눈은 흘기면서도 밥 한그릇 수저 한 벌 더 놔줬다.
하숙생들의 향토장학금(고향집에서 부치는 생활비)을 담은 우편환이 도착한 날이면 반찬이 푸짐해지고 불고기같은 특식도 나왔다.
하숙집이래야 겨울이면 웃풍이 심해 손이 얼고,아침이면 화장실 앞에 줄을 서야 하는 허름한 한옥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거기엔 끈끈한 정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일이 생기면 하숙생 전원이 함께 걱정하고,반찬이 짜고 맛없는 등 대우가 나쁘니 단체로 옮기겠다고 했다가도 주인집 아주머니의 풀죽은 얼굴을 보곤 유야무야 주저앉았다.
이런 하숙집이 사라진다고 한다.
귀가시간 음주 등 매사에 눈치 안보고 자유롭게 행동하고 싶은 학생들이 원룸과 고시텔을 찾으면서 전통적인 하숙집은 줄어든다는 것이다.
아무리 '깨끗하고 가족같은 분위기'를 내세워도 TV 냉장고 책상이 완비된 원룸 등에 밀린다는 얘기다.
이대로 가면 '하숙'이란 단어가 사라질 지도 모른다고 한다.
하숙집은 정보교환장이자 토론장이고 학습장일 수 있다.
여럿이 모여 시대와 세상을 논하고 실연의 상처도 달랠 수 있는. 원룸에 사는 대학생들은 컴퓨터게임과 채팅 등을 하며 혼자 지낸다.
불편하고 조심스러워도 더불어 사는 삶의 지혜를 익히는 데는 하숙집이 그만이라고 한다면 너무 고루한가.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