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급을 준다기에 통장을 따로 만들었다.경리과에 신신당부해 그쪽으로 입금받은 날.아,뿌듯해라.빌린 돈 갚고 술 한잔 걸치고 아내와 애들 선물도 샀다.모처럼 대접받고 자존심도 세웠다.사장에게 특별보너스 받았는데 절대 비밀이라고 둘러댔다.얼마 뒤 들통나 통장 차압당하고 한달 금주령까지 받았다." 아내 몰래 비자금을 조달해 쓰다 들킨 남편의 고백이다. 다른 가장들의 처지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월급과 보너스 모두 아내가 관리하는 통장으로 자동이체돼 용돈을 타쓰는 신세가 되다 보니 친구들과 마신 술값 한번 선뜻 내기 어렵다. 그러니 연월차 수당이나 성과급만이라도 챙겨 비상금을 장만해보려 애쓰는 것이다. 계좌이체가 등장한 것은 80년대 초.은행들이 온라인 전산시스템을 갖추면서 시작,제조업체들에 권장함으로써 확산됐다. 지금은 명세표조차 주지 않고 인터넷에서 확인하게 하는 마당이다. 월급날 풍경 또한 확 달라졌다. 밀린 식대며 술값을 받기 위해 회사 앞에 진치던 가게 주인들의 모습이 사라진 건 물론 월급 명세표를 조작하던 궁색한 일도 없어졌다. 계좌이체의 장점은 많다. 경리 직원들이 온종일 돈을 세어 담지 않아도 되고,현금수송 가방을 강탈당하거나 월급봉투를 잃어버릴 일도,괜스레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술을 마시거나 불필요한 돈을 쓸 일도 적다. 아내들의 경우 월급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는데다 남편의 음주 횟수도 줄어드니 일석이조라고 한다. 그러나 남편들의 입장은 다르다. 봉투를 내밀면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푸짐한 밥상을 받던 일은 고사하고 용돈을 타느라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현금봉투를 주든 안주든 가족의 생활을 책임지는 건 마찬가지인데도 정작 돈을 내놓지 못하고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고 보니 마치 무장해제된 병사같다는 얘기다. 올 1월부터 월급을 은행에 자동이체시키지 않고 현금으로 주는 곳이 생겼다는 소식이다. 평화방송이 가장의 가정 내 위상을 되찾게 해주고자 월급봉투를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두툼하든 얇든 봉투를 받으면 뿌듯할 게 틀림없다. 그러니 어쩌랴.이제 와서 죄다 월급봉투를 달랄 수도 없고.그저 1년에 한두 번 특별보너스라도 현금으로 주기를 기대할 도리밖에.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