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종 < 서울대 교수ㆍ정치학 > 최근 정부는 여운형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키로 하는 한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광화문현판도 바꾸고 정조의 글씨로 채자할 예정이다. 한·일협정문서도 공개되면서 정치적 파장을 야기하고 있어 광복60주년을 맞아 역사재평가 논의가 한창 진행될 것 같다. 흔히 '역사읽기'는 역사가의 몫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정부나 정치권이 적극적으로 역사재평가에 나서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다. 과연 이 재평가과정에서 '산 권력'이 '죽은 권력'을 압도한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60세가 된 개인을 '이순(耳順)'의 나이라고 할 수 있다면, 대한민국도 이순의 나이에 들어선 셈이다. 생각해 보면 60년간 영욕이 교차했다. 헐벗음과 억압도 있었고 또 압축성장과 민주화도 있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종합성적표는 무엇인가. 아직도 뼈아픈 미완성을 세 가지 들 수 있다. 민족주의의 미완성, 산업화의 미완성, 민주화의 미완성이 그것이다. 시대착오적인 국토분단과 민족분단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민족주의의 미완성이며 노사분규의 다발성이야말로 산업화의 미완성이다. 또 국회의원들의 거친 말싸움과 패싸움 때문에 초·중·고등학생들에게 국회견학을 시키지 못하는 것도 민주화의 미완성이다. 하지만 이런 대한민국의 미완성은 밥은 되었지만 '뜸은 들지않은 밥'의 미완성과 비슷하다. 혹은 '화룡점정(畵龍點睛)'처럼, 용은 그렸으되 눈은 그리지 못한 유형의 미완성이다. 지난 60년은 우리 모두 창의력과 상상력,끈기,열정을 기울인 실존의 역사다. 그 결과 가난이 가난이 아닌 것으로 바뀌어졌고 세계적인 한국기업들도 부상했다. 한류열풍이 일본과 중국을 비롯하여 동남아를 강타하고 있는 것도 노력의 결실이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오랜 포도주의 숙성함처럼, 대한민국의 숙성함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포용정책을 통하여 북한을 한 동포로 껴안을 수 있는 것도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일 뿐,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에 대한 부러움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국민은 "죄많은 나라에 태어난 죄인"이라는 원죄의식을 가져야 하는가. 또 그것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주술'처럼 주입시켜야할 것인가. 만일 그런 원죄의식을 갖는다면 근거없는 '허위의식'일 터다.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사실주의'가 빠져있는 창백한 원죄의식이기 때문이다. 또 그런 허위의식을 가져야 억압과 독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광복60년을 '반칙과 특권의 역사'로만 규정짓는다면, 그 동안 우리가 흘린 피땀은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인가. 광복6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현 세대는 거인들의 어깨위에 앉아있는 '난쟁이'로 생각해야지 난쟁이들의 어깨위에 앉아있는 '거인'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영웅은 없고 친일파와 억압자만 있었다고 평가한다면, 자학과 자조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건국과 부국을 이룬 이 시점에서도 국민이 기억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은 조선시대의 이순신 장군과 정조 세종대왕 밖에 없다는 생각은 너무 고루하고 편협한 생각이다. 과연 대한민국에는 '건국의 아버지'도 없고 '산업화의 아버지'도 없는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자신은 결손가정이나 천애고아처럼 처신하는 셈이다. 존경해야 할 정치가는 미국의 워싱턴이나 링컨밖에 없고 또 존경해야할 기업가는 록펠러나 자동차왕 포드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알량한 사대주의가 아닐까. 또 매판자본가만 있을 뿐 민족주의적 기업가는 없다고 치부하는 것도 이념적 콤플렉스다. 현대의 정주영이나 삼성의 이병철도 '제2의 임상옥'과 다를 바 없고 '한국판 록펠러'나 '한국판 포드'로 불릴 만하지 않은가. 이쯤되면 광복 60주년을 맞아 해야 할 일이 명백해진다. '역사지우기'나 '현판 바꾸기'가 아니라 대한민국 현대사에 대하여 '사실주의'를 도입하는 일이 시급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