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13일 새벽. 밤새 쏟아붓던 폭우와 세찬 바람이 겨우 잠잠해졌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뒤 마산 돝섬의 조류전시관으로 달려갔다.


한가닥 희망을 걸고 향했지만 그곳은 이미 폐허로 변해 있었다.


척추와 다리 장애라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자식처럼 키워온 통영 관상조류 농장의 새들.하지만 태풍 '매미'에 2천2백여마리가 날아갔다.


새에 걸었던 꿈과 희망도 모두 떠나갔다.


그러나 나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남은 새들과 함께 다시 비상할 것이다.


반드시.


관상용 조류라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것은 새에 대한 애정때문이었다.


일종의 농업벤처회사다.


그러나 현재는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한때 '새 아빠'로 통할 정도로 유명세도 탔지만 기술과 열정이 곧바로 사업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란 것을 지금에야 절실히 깨닫고 있다.


내가 원래부터 장애인에 신용불량자였던 것은 아니다.


사실 국제바텐더자격증과 한식.중식 요리사자격증을 갖고 있을 만큼 나름대로 성실하게 미래를 준비해왔었다.


90년 국내 굴지의 S그룹 계열 경비회사에 취직해서도 직장생활은 즐겁기만 했다.


91년,회사에서 개 훈련요원으로 선발돼 마약탐지 및 맹인안내 등을 훈련시킬 때였다.


독일에서 고가의 셰퍼드를 들여온 일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개를 구경하러 찾아오는 걸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동물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돈벌이를 할 수 있겠구나.'


마침 군 제대 후부터 취미삼아 키우던 새들이 4∼5년 동안 수백마리로 늘어나 5평 남짓한 방안을 가득채우고 있을 즈음이었다.


92년 퇴사를 결심하고 거제에 첫 새농장을 열었다.


논 2백평을 임대해 50평짜리 비닐하우스를 짓고 새 3백쌍을 사들였다.


새들은 1년 만에 1천쌍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연탄가스 누출사고로 떼죽음을 당하자 다시 고성으로 옮겨 이번에는 2천쌍을 사육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악운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96년 비닐하우스 안에 있던 난로불이 새 깃털에 옮겨붙으면서 화재가 발생했다.


비슷한 시기에 중앙선을 침범한 대형 트럭과 충돌사고가 나면서 나는 척추마저 크게 다치고 말았다.


꼭 1년6개월 동안 병원에서 꼼짝못하고 누워있었다.


병 수발하기에도 버거웠던 아내가 새들을 돌볼 수 없었던 건 너무나 당연했다.


남아있는 새들마저 모두 죽일 수밖에 없었다.


장애인이 되자 새에 대한 애정은 더 커져갔다.


몸이 불편하니 새를 기르는 일밖에는 할 일이 없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사업을 반대하던 아내도 적극 돕겠다고 나섰다.


97년 잉꼬 문조 앵무새 금강앵무 등 관상용 조류 판매와 새를 이용한 각종 이벤트 사업을 아이템으로 통영관상조류농장을 세웠다.


시설비 1억2천만원 중 9천여만원을 은행에서 빌려 농지 6백평을 임대하고 사육장으로 50평 조립식 건물을 지었다.


일단 40종류의 새 3천쌍을 사들였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매년 동남아 등지로부터 50만쌍의 조류를 수입하는 일본 시장을 뚫어 98년부터 수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5년간 일본에 수출한 금액만 19만2천달러어치.2000년에는 경남농업기술원과 중기청의 도움으로 홈페이지(www.birdtown.co.kr)를 개설해 택배로도 새를 판매했다.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희귀하고 아름다운 새를 가져오는 일부터 부화율을 높이고 사망률을 낮추는 기술을 연구하는 것까지 하루 해가 짧기만 했다.


잉꼬 문조 앵무새들이 사람의 어깨 위로 올라타고 말을 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다.


새 대여와 각종 조류 전시회 개최로 수입은 짭짤했다.


한국기네스북에 희귀 조류를 가장 많이 가진 사람으로 뽑히기도 했다.


백화점에 새를 전시해 주고 받은 월 수입이 1천5백만원,잡지사나 건설업체 분양사무소 등에 새를 빌려주면 한 번에 몇 백만원씩 손에 쥘 수 있었다.


2003년 가을 원주 치악산에서 개최한 세계희귀관상조류전시회에서는 5만여명의 관람객을 끌어모아 입장료 수천만원을 벌기도 했다.


나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2003년.그해 4월 마산 돝섬과 제주도에 총 4억여원을 들여 전시관을 차렸다.


5월까지만 해도 월 5백만원은 거뜬히 벌어들이던 전시관들은 그 해 들어 유난히 길었던 여름장마를 만나면서부터 경영이 어려워졌다.


평일에는 입장객이 거의 없고 주말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려 야외 이벤트는 꿈도 못꿨던 것.


거기다 9월에 태풍 '매미'가 불어닥치면서 전시 중이던 새 2천2백여마리가 모두 날아가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에 수출했던 컨테이너 2개 분량의 새는 조류독감 탓에 반품돼 돌아왔다.


모 지자체와 공동으로 추진했던 조류전시관 건립사업도 무산됐다.


결국 빚더미에 앉게 된 나는 2003년 11월 가계수표 3백만원을 막지 못해 부도 통지를 받았다.


2004년 4월에는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혔다.


현재 대출금 2억5천만원에 연 19%의 연체이자가 쌓여가고 있다.


주유소 등에서 온갖 잡일을 하며 급식비를 버는 아들에겐 미안한 마음뿐이다.


임차한 농장 땅 6백평과 축사 1백30평,1백종류의 새 8백마리가 내가 가진 전 재산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게는 꺼지지 않는 희망이 샘솟는다.


언젠가는 싱가포르 주롱새공원에 있는 것과 같은 세계적인 새테마파크를 직접 건설할 꿈을 꾸고 있다.


현재 새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벤트 사업 등을 준비하고 있다.


새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믿음' 하나 때문이다.


20년간 복역 중인 수감자에게 새를 보내줬더니 그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다고 고마워했던 일이 떠오른다.


새는 그런 존재다.


결국은 다시 날아오르고야마는 새처럼 나도 반드시 다시 비상할 것이다.


(055)647-0001


정리=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