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에서 배운다] (6) 이종열씨 '마음만 앞섰던 제조업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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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9월.나는 4천만원짜리 어음을 막지 못해 끝내 부도를 맞고 말았다.
7년 동안 키워왔던 제조업체 사장의 꿈도 함께 수포로 돌아갔다.
급조한 공장에서 좋은 제품이 나올 리 만무인데 마음만 앞선 것이 결국 화를 불렀다.
자식 잘 키우려면 부모 능력과 자녀의 성장 가능성을 잘 따져본 뒤 구체적인 계획을 밀어붙여야 한다.
그래도 변수가 돌출하게 마련.제조업도 마찬가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뒷감당은 생각지 못한 채 모든 걸 서둘렀다.
세월이 키울 몫을 내가 나섰던 것은 아닐까.
나는 지금 전국의 시골 장을 찾아다니며 어린이를 상대로 한 신종 만화영화 캐릭터 사업을 펼치고 있다.
동안(童顔)에서 재기의 끄나풀을 찾고 있는 터.
1987년. 나이 서른이 되던 해에 나는 대성공을 거뒀다.
직장을 그만두고 2백70여만원을 들여 에어필터 수입업체를 세워 6개월만에 매출액 1억원대의 회사를 만든 것이다.
전자제품이나 의약품을 제조하는 공장에선 에어필터가 필수품.당시 에어필터를 제조하는 회사는 극소수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전략을 제대로 잡은 셈이다.
하지만 너무 쉽게 거둔 성공은 자만을 낳았고 자만은 눈을 멀게 했다.
창업 당시만 해도 나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대기업 L사를 비롯 제약업체,병원 등의 담당자에게 제안서를 보내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 살폈다.
결과는 좋았다.
상사들에게 자신의 아이디어인양 보고해 칭찬을 받은 담당자들은 잇따라 주문을 냈다.
여기에 구미공단 전자업체들이 청주지역으로 공장을 이전함에 따라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됐다.
내 첫 창업 작품인 '대덕엔지니어링'은 1년도 안돼 월 1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순항을 했다.
그러나 필터 납품량이 늘어날수록 욕심이 커져간 게 화근이 될 줄이야.단순 수입·유통으로는 성에 안찼다.
업체들은 공장이 없기 때문에 대단위 발주는 꺼렸고 삼성전자 같은 대기업은 아예 외국회사와 직거래를 트기도 했다.
공장만 생긴다면 산업의 성장성을 감안할때 매출액 50억원은 무난할 것으로 생각했다.
결국 이듬해 전에 보아두었던 필터공장을 18억원에 인수했다.
여차하면 '모든 것은 팔아서 해결한다'는 신조가 있었던 터라 두렵지는 않았다.
89년 우여곡절 끝에 첫 발주를 시작했으나 때를 놓쳤다.
국내 중견 건설업체인 S건설이 필터사업을 위해 공장을 세운다는 소식이 퍼지더니 필터가격은 순식간에 60% 가까이 떨어졌다.
기존 거래업체들은 종전 가격대로 물량을 주문하고 있었지만 언제 끊길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공장은 순식간에 계륵같은 존재가 돼버렸다.
나는 필터공장을 미련없이 매각했다.
손절매한 덕에 손해는 크지않았던터라 수업료를 냈다고 자위했다.
하지만 앞으로 찾아올 불행에 비교하면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내림세를 보이던 필터가격이 90년 들어 조금씩 오름세를 보였다.
거래를 중단했던 연구소도 다시 주문을 해오며 형편이 나아지자 슬슬 제조업에 대한 욕심이 도졌다.
이번엔 필터가 아니라 필터에 들어가는 필터 여과지가 돈이 될 것 같았다.
어느날 필터불량 제품을 분해하면서 '바로 이거다'라며 무릎을 쳤다.
필터 여과지는 제지생산라인에 펄프와 장섬유를 섞어 부직포를 제조하는 습식부직포제조기술을 써야 하기 때문에 건식포제조기술에 익숙한 일반적인 부직포 업자들이 생산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틈새시장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기술인 펄프와 섬유의 배합기술은 화학연구소에 의뢰해 연구를 계속했고,동시에 생산라인 건설에 따른 비용 계산에 들어갔다.
대지 3천평,건물 1천평 생산기기와 폐수처리장 건설 등에 들어가는 비용이 최소 2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됐다.
준비된 자금은 4억원에 불과했으나 대덕엔지니어링의 연 매출 16억원이 있었다.
당시 여과지는 제조원가 대비 8∼9배 정도의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다.
성장률도 연 2백%이상을 웃돌았다.
당시 계산대로라면 20억원을 투자해 연 매출 1백50억원 이상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즉시 공장부지 매입에 착수했다.
하지만 나는 가장 단순한 사실을 간과했었다.
당시 공장건설 대금으로 지인이 보유한 공시지가 10억원 정도의 토지 매각대금을 계산해 뒀으나 91년부터 토지값이 폭락하며 매수세가 자취를 감춘 것이다.
건설비용과 부지 매입대금을 보유한 현금으로 지급하고 남은 자금 2억원도 건설업체와 기계업체에 지급해야 했다.
이도 부족해서 결국 죽기보다 싫었던 어음에 손대고 말았다.
이때 나는 이미 맨손으로 공장을 지켜내려는 독불장군으로 변했던 것 같다.
최대한 빨리 샘플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공장 건설공사를 급히 끝냈지만 생산해 낸 필터지는 불량률이 90%에 달했다.
어음 발행 규모는 점점 커져나갔고 93년 2월부터는 대덕엔지니어링의 결제자금마저도 어음을 막는데 동원해야 했다.
섬유와 필터의 뭉침현상을 풀기위해 내가 아는 기술자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등 모든 수단을 강구했으나 불량률은 40%이하로 줄어들지 않았다.
93년 4월부터 11월까지 지인들로부터 끌어들인 자금이 무려 7억원을 넘어섰으며 총 어음발행 금액은 25억원을 넘고 있었다.
결국 94년 9월말 돌아온 어음을 결제하지 못해 부도를 맞게 됐다.
정리=임상택 기자 lim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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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열씨 사업연대기>
△1987년 2백70만원으로 에어필터 수입회사 창업
△1988년초 구미공단 전자업체 이전으로 '대박'
△1988년말 필터공장 완공
△1989년 필터가격 폭락으로 이익 급감,공장 매각
△1990년 필터 여과지 공장 착공
△1991년 투자자 토지가격 폭락으로 공장건설비 부족,어음 발행
△1993년 불량필터지 생산,사채업자 자금 대출
△1994년 총 어음발행규모 25억원 육박,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