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에서 배운다] (7) 정대헌씨 '열릴듯 말듯한 수익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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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사업가의 꿈.'
이것이 '나의 뉴밀레니엄'을 송두리째 빼앗아갔다.
아이디어만 믿고 꿀단지가 열리는 걸 기다린 꼴이다.
생각해 보면 빨리 찾아온 실패가 차라리 위안이 될 따름이다.
인터넷 리서치업체인 옴부즈닷컴은 한때 인터넷에서 뉴스 및 리서치업체 랭킹 5위로 뛰어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에 얼굴을 내민 지 1년반 만에 운명을 달리했다.
'안하무인식' 경영을 한 탓이다.
그 업보로 3년째 빚을 갚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회사가 문을 닫을 때 얻은 딸은 벌써 네살배기가 돼 내 고단한 어깨를 주무르고 있다.
그게 힘이 된 건지.
얼마 전 나는 회사 하나를 새로 세웠다.
재기를 위해.
나는 올해 만 34살.
나의 스토리는 지난 2000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나는 서울에서 부모님이 마련해주신 돈으로 전셋방을 얻어 신접살림을 차렸다.
조그만 중소기업의 기획실에서 근무하던 중 사업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돈을 대주겠다는 지인과 함께 컨설턴트를 찾았으나 반응이 영 아니었다.
"아이디어는 기발하지만 성공 확률은 2%"라나.
사업자금을 도와주겠다던 지인도 "투자를 유보하겠다"며 한발짝 물러섰다.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기에는 내 젊음과 배짱이 아까웠다.
엔젤투자자의 지갑이 열리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살던 집을 월세로 옮기고 전세보증금으로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처음에 아내는 펄쩍 뛰었다.
그러나 발을 동동 구르는 내모습을 지켜보던 아내는 며칠 뒤 내손을 잡아주며 전세금을 내밀었다.
이 돈으로 2001년 5월 서울 보라매공원 인근 한 벤처타운에 10평짜리 사무실을 얻었다.
옴부즈닷컴은 가족들이 월세방으로 옮기고 탄생할 수 있었다.
최고의 온라인 리서치 회사를 만들겠다고 다짐한 나는 4명의 직원과 성공신화를 향해 달려나갔다.
사이트 개발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밤을 새워가며 개발에 몰두하는 직원들의 열기를 식히기엔 보라매공원의 밤바람도 부족했다.
하지만 밑천은 금세 바닥났다.
추가 자금이 필요했다.
금융기관을 찾았으나 담보 부족에다 부모님이 내 명의로 대출받고 이자를 제때 내지 않아 남아있는 연체기록 때문에 대출은 불가능했다.
난감했다.
자금조달이 벽에 부딪히면서 회사는 더욱 곤경에 처했다.
매월 7백만∼8백만원씩 지출되는 비용을 감당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버거웠다.
'자금이라는 암초에 부딪혀 좌초하고 마는구나'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경비 절감을 위해 직원을 내보내는 길밖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창업동지였던 리서치전문가와 플래시애니메이터 2명을 내보냈다.
동료를 내보내던 8월 말 보라매공원 잔디밭에서 낮술을 마시고 넥타이 차림에 지쳐 쓰러지도록 운동장을 달렸다.
맞벌이를 하던 아내가 임신한 시기도 이맘 때다.
몸집을 줄인 9월부터 다시 프로그램 개발에 매진했다.
하지만 개발팀과의 의견이 엇갈리면서 애시당초 계획했던 그림에서 자꾸 벗어났다.
개발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통장에는 잔액이 거의 동났다.
하는 수 없이 소액대출로 직원 월급을 주기 시작했다.
방향도 못잡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인터넷에서 내가 생각한 아이템이 다른 사이트를 통해 상용화되고 있는 것이 목격됐다.
자신감을 잃어갔고 직원들도 반발하기 시작했다.
"사장님 언제까지 수정만 하고 계실 건데요."
프로그래머가 회사를 그만뒀다.
얼마 후엔 디자이너가 떠났다.
하나둘 쌓아온 공든 탑은 무너져내렸다.
자포자기하고 있을 때 특허출원서(게시판의 맞춤페이지 구성을 이용한 실시간 광고방법 및 시스템) 한장이 도착했다.
이때 임신 5개월이던 아내가 어디서 마련했는지 내손에 쥐어준 5백만원이 비상의 날개를 펴게 했다.
직원 3명을 뽑아 개발 두달만인 2002년 1월 사이트를 열었다.
그날의 감동은 잊을 수가 없다.
그해 4월 접어들면서 사이트 방문자 수가 급속히 늘었다.
웹사이트 순위평가에서 인터넷신문분야 5∼10위권에 진입하는 등 인기가 수직상승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회사에 떨어지는 수익이 없었다.
다시 명동 사채시장에서 자금을 변통하기 시작했다.
7월 들어 금융기관으로부터 빚을 갚으라는 독촉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벼랑에 선 난 8월26일 눈물을 머금고 사업을 정리했다.
아내 딸과 고향인 전주로 내려갔다.
남은 건 1억원의 부채와 신용불량자라는 멍에뿐이었다.
고향에 내려온 나는 낮에는 아버지의 조경사업을 돕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며 빚을 갚아나갔다.
2003년 12월 개인워크아웃 승인을 받아 신용불량자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났다.
현재 조경수목을 인터넷에서 매매하는 새로운 사업을 준비 중이다.
최근 중기청의 성공실패사례 수기공모에서 받은 상금 3백만원을 자본금으로 '미래조경산업'이란 회사를 설립,새출발에 나섰다.
정리=이계주 기자 lee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