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에서 배운다] (8) <끝> 기술력만 믿고 창업한 최철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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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은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한 G사의 선임 연구원이었다.
공업전문대학과 4년제 대학의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첫 직장에 들어가 11년을 보냈다.
당시는 경제 형편이 좋았던 데다 G사도 쑥쑥 자라나고 있어 더할나위없이 안정된 직장이었다.
나는 그 복덩이를 차고 나왔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인생을 걸고 승부하고 싶다는 패기.그게 나를 움직였다.
생각은 복잡했지만 실행은 간단했다.
감원이나 명예퇴직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하던 94년 과감하게 대기업을 그만뒀다.
창업 아이템도 진작부터 마음속에서 키웠던 터다.
자동차 정비분야였다.
당시 기계식 일색이던 자동차가 90년대 들어서면서 전자 제어식으로 전환된 데다 자동차 정비항목 중 전자제어 부문이 가장 어려워 정비공들도 쉽게 처리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결심을 굳혔다.
자주 들르던 정비업소에서 설익은 서비스에도 선뜻 정비료를 내는 손님들을 보며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서비스를 제공하면 모두 내 손님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사표를 낸 뒤 나는 자동차 정비학원의 오전 오후 야간 수업을 모두 들으면서 준비한 끝에 1년만인 95년말 총 5개의 자동차 관련 국가기술자격증을 취득했다.
기름때와 씨름한 결과였다.
내친김에 어렵기로 소문난 전자응용기술사 자격증까지 따냈다.
나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준비완료.
97년 11월 수원에서 꿈에 그리던 창업을 하게 됐다.
자동차 3급 부분정비업체였다.
퇴직한지 4년만에 이룬 결실이다.
장소는 오랫동안 눈독을 들이던 곳으로 대기업인 삼성전자 직원들이 왕래하기 편리하도록 삼성전기 정문 입구에서 가까운 거리였고 집에서도 도보로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4차선 도로와 2차선 이면도로가 접한 코너 자리로 원래 카센터가 있던 자리였으나 법정소송으로 4년간 방치돼 있던 곳이었다.
전체 평수 77평 중 사무실 20평,나머지 57평은 주차와 정비공간,창고 등으로 사용했다.
자본금은 퇴직금 5천만원과 보험 해약금 1천만원,장비 구입자금으로 어머니께 빌린 1천만원이 전부였다.
엔진오일교환이나 펑크 수리 등 일반 카센터에서 하는 정비를 기본으로 전자제어정비 전문점이라는 차별화전략을 구상했다.
주변 카센터들이 수주한 걸 재하청받는 '업자수리'도 내걸었다.
타깃은 삼성그룹 직원들.인테리어에도 부쩍 신경을 썼다.
2개의 깊고 지저분한 기름구덩이(피트)를 메우고 그 위에 시멘트를 붓고 평탄하게 만든 후 에폭시수지로 2회에 걸쳐 도장을 했다.
각종 정비장비가 깔끔하게 자리잡았다.
실내는 온통 하얀 색으로 칠하고 원탁 테이블을 배치해 손님들이 커피나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기름 투성이로 지저분한 기존 정비업소와는 달리 깨끗하고 산뜻하게 꾸몄다.
흡사 '정비연구소' 같았다.
정비학원에서 만난 동료 2명을 정비사로 채용했다.
대기업에서 배운 '고객만족'을 실천해 나간 덕분에 사업초기부터 단골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
한 번 방문한 손님은 반드시 데이터 베이스에 올려 치밀하게 관리해 나갔다.
엔진오일 교환 작업 시 각종 오일류를 점검해주는 한편 타이어공기압 확인이나 엔진룸세척도 부가적으로 해줬다.
저렴한 정비수가를 적용하고 고장부위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자 입소문이 나면서 서울 오산 송탄 등지에서도 손님들이 찾아왔다.
주변 카센터에서 시샘을 할 정도로 늘 손님들로 붐볐으며 병원에 오는 환자처럼 날짜를 지켜서 예약정비를 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문제는 친절이 고수익을 담보해 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북적이는 손님들로 한때 월매출이 6백만원까지 올라갔지만 수익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무턱대고 내걸었던 무상서비스의 후유증 탓이다.
게다가 개업한 지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외환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손님이 하나 둘 씩 줄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98년초 삼성그룹의 과장급 이상 직원 중 다수가 SM5 신차를 구입하면서 정비 일거리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직격탄이었다.
SM5시리즈는 브레이크 패드도 4년이 지나야 교환하는 데다 타이밍벨트도 체인식이라 몇 년이 지나도 교환대상이 아니었다.
이즈음 월급주기도 빠듯해지자 정비기사 1명이 스스로 떠났다.
99년에는 나머지 정비기사도 떠나겠다고 나섰다.
가게 터가 좋아 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월세 1백20만원(임대보증금 3천만원)도 큰 부담이 됐다.
나 혼자만 남았다.
휴일에도 쉬지 않고 나와 일했지만 2001년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자 고객관리도 뒷전으로 미룰 수 밖에 없었다.
2001년 11월,결국 카센터를 매물로 내놨다.
내 나이도 이제 50세가 됐다.
기계와 함께 한 첫번째 사업이 실패로 끝났지만 나는 여전히 재기를 꿈꾸고 있다.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금 엔지니어 출신 사장으로 거듭날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정리=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