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의 보고서 한 줄이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들었다. 외환보유액의 통화구성을 다변화하겠다는 한은 방침이 외신을 통해 타전되자마자 엔화와 유로화 등 세계 주요 통화에 대해 달러화가 일제히 큰 폭의 약세를 나타냈다. 미 국채 금리가 상승하는 등 채권시장도 들썩였다. 화들짝 놀란 한은이 진화에 나섰지만 대응 속도가 늦었고 방식도 어설펐다. 시장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외환 당국자들의 의식수준이 한국 경제의 높아진 위상을 따라가지 못해 발생한 해프닝"이라고 꼬집었다. ○한은,방아쇠를 당기다 지난 21일 오후 4시께 한은은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 제출할 업무보고 자료를 기자실에 배포했다. 정식 보도자료는 아니었고 참고만 하라는 뜻에서 '참고용'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기사마감 시간도 지난 터라 기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흐른 오후 9시.세계 주요 통신사 가운데 하나인 로이터가 한은의 국회 업무보고 자료 한 부분을 인용해 "한은이 외환보유액의 포트폴리오(자산구성)를 바꿀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곧 이어 미국 방송사인 NBC와 CNN 등이 아시아 관련 톱 뉴스로 이 같은 사실을 긴급히 전달했다. 해외 투자은행들은 "이례적인 일"이라는 코멘트를 곁들였다. 이로 인해 엔·달러 환율과 유로·달러 환율 등이 일제히 달러약세 쪽으로 내리달았다. 대만달러 가치는 7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높아졌다. 이러한 세계 금융시장의 충격은 부메랑처럼 한국으로 돌아와 23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이 오전 한때 1천원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가뜩이나 달러화 기조에 민감하던 국제금융시장에 한은이 기름을 부은 꼴"이라고 설명했다. ○어이없는 한은의 대응 한은의 자료 가운데 문제가 된 부분은 "외환보유액 확대에 따른 수익성 제고 및 운용능력 확충을 위해 상대적으로 금리수준이 높은 비정부채 투자를 확대하고 투자대상 통화도 다변화할 방침"이라는 단 한 줄.그 중에서도 작년 국정감사 자료에는 포함돼 있지 않던 '투자대상 통화 다변화'라는 문구가 화근이었다. 얼핏 보기엔 대수롭지 않은 대목이었지만 뉴욕 월가의 애널리스트 등을 통해 "세계 4위의 외환보유국가인 한국이 달러 자산을 털어내려 한다"는 신호로 확대 해석되면서 파장이 증폭됐다. 사태가 이처럼 확산되자 한은은 23일 부랴부랴 진화에 나서느라 진땀을 흘렸다. 한은 관계자는 "국회 업무보고 내용은 통상적인 수준이며 당장 달러화를 매각하는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왜 이렇게 대응이 늦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한은은 당장 대응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상황에만 대응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한은의 뒤늦은 설명에 시장 참여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외국계 은행 딜러는 "불과 얼마 전에 중국과 러시아의 중앙은행이 똑같은 사안으로 국제 금융시장을 뒤흔든 적이 있었는데 한은은 이런 일을 몰랐던 것인지,아니면 알고서도 무시했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최공필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원화강세 압력으로 시장 불안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구태여 지금 그런 얘기(통화 다변화)를 할 필요는 없었다"며 "발표 타이밍이 부적절했다"고 지적했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