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 9시3분. 산업은행 외환거래1팀의 수석 외환딜러 이정하 과장(38)은 다급히 매매 단말기의 엔터키를 눌렀다. '999.1원에 달러매수' '998.5원에 달러매수' 등등 불과 10여초 사이에 4천만달러어치의 달러를 샀다. '베팅'순간이었다. "1천원 아래는 아무래도 오버 슈팅(과매도)"이라는 직감이 섰기 때문이다. 이후 이 과장의 심장박동은 더욱 빨라졌다. 환율이 더 떨어지면 손실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전날 환율급락으로 큰 손실을 본 터였다. 수석딜러로서의 체면은 차치하더라도 이날 손실을 또 보게 되면 '치명상'을 입게 될 처지였다. 이 과장은 간밤에 잠도 설쳤다. 손실을 입어 신경이 곤두서있는 데다 런던과 뉴욕에서 시시각각 핸드폰 문자 메시지가 날라왔기 때문이다. '1m krw last gvn at 03.5(1개월물 원달러 환율 1003.5원 체결),1m krw 02/03.5(현재 매수주문은 1,002원이며 매도주문은 1,003.5원)' 등등.자정무렵에는 뉴욕시장에서 한국은행의 '달러매각설(說)'로 달러화가 급락했다는 뉴스까지 날라왔다. 이러니 아침을 맞는 이 과장의 머리는 복잡할 수 밖에 없었다. 전날 밤 정황으로 미뤄보건대 서울외환시장도 'BOK(한국은행) 쇼크'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1,000이 무너질 수 있다….' 환율은 그의 예상대로 개장 초 곤두박질쳤다. 스톱로스(손절매) 물량이 쏟아지며 심리적 지지선(1,000원)도 무너졌다. 전날의 패닉상황이 이어진 것이다. 그가 '사자'주문을 낸 것도 바로 그 때였다. 그로부터 1시간여 지나자 환율은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그의 예상이 적중한 셈. 숏커버링(short covering:달러매도 세력이 다시 달러를 사들이는 것) 물량이 들어왔다. 때마침 한은이 '달러매각설'을 부인하고,재정경제부에서 "환율안정이 필요하면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구두개입도 나왔다. 오전 11시경. 그는 다시 단말기 엔터키를 쳤다. 이번엔 '팔자'주문이었다. 1,005∼1,006원 사이에서 개장 초 샀던 4천만달러를 모두 처분했다. 전날의 손실을 대부분 만회하는 순간이었다. 이 과장은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 과장의 평소 일평균 거래대금은 1억∼2억달러.그러나 전날에는 4억달러,24일에는 3억달러를 거래했다. 이 과장은 "환율변동이 심할수록 포지션에 따라 손익 변동이 심해지기 때문에 거래도 늘어나게 된다"면서 "많을 때는 하루에 1백번 이상 달러를 사고 팔 때도 있다"고 했다. 개장부터 오후 4시 장이 끝날 때까지 온종일 전화통을 잡고 씨름하며,단말기에서도 눈을 뗄 수 없다. 브로커를 통한 다른 금융회사의 매매정보,기업의 주문동향 파악,도쿄외환시장 등 체크할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이날도 그를 비롯해 6명의 딜러들이 모두 햄버거로 점심을 때웠다. "불과 5초,10초 만에 수십만달러를 허공에 날려버릴 수 있는 요즘같은 상황에서 잠시라도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는 설명이다. 마침내 오후 4시. 장이 끝나자 이 과장의 견비통이 또 다시 도졌다.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뿐. 6시부터 런던시장이 열린다. 장중에 매매하지 못한 포지션이 남아 있을 경우 런던시장에도 거래를 해야 되기 때문이다. 장진모 기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