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철 < 세계경영연구원 이사장 > 20세기는 노조의 시대였다. 1차대전을 전후해 유럽에서 시작된 강력한 노조운동은 2차대전을 즈음해선 전유럽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노조에 가입할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이른바 '복지국가'는 강력한 노조와 동일시될 정도로 세계 각국에서,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1987년 이후 시작된 우리나라 강성노조도 결국 이같은 유럽 노조운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강성노조의 원조인 유럽,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부자나라 그룹인 서유럽에서 이러한 구도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우선 지난 20년동안 서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조가입자 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영국은 반 이하로 떨어졌고 프랑스에서는 10% 이하로 떨어졌다. 강성노조의 원조인 독일에서도 노조 가입률은 이전 35%에서 최근 들어 20%를 조금 넘는 수준으로 추락했다. 단순히 숫자만이 아니다. 10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할 각종 굴욕적 단체협약이 체결되고 있다. 독일에서는 다임러 크라이슬러 벤츠,지멘스,도이치텔레콤,폭스바겐 같은 굴지의 회사를 포함 50여개의 중견기업에서 임금 삭감,보너스 포기,초과근무,유연한 작업스케줄 등 새로운 조건들에 노조가 합의하고 있다. 독일노조는 더 이상 산별 노사협약을 고집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유럽 부자나라들에서는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이기 위한 노동법 개혁이 일어나고 있다. 강성 노조의 모태라 할 수 있는 독일에서 집권당이 정리해고를 더 쉽게 하는 법안을 상정했고 프랑스에서는 주 35시간 이상 노동을 가능케 하도록 규제를 완화했다. 왜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서유럽의 노조와 국가들이 바로 세계화가 가져온 엄청난 외부로부터의 경쟁에 직면하게 됐기 때문이다. 폭스바겐은 독일 하노버와 폴란드의 포즈나에 똑같은 미니밴공장을 갖고 있다. 그러나 포즈나공장 임금은 하노버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여차하면 생산을 포즈나로 옮겨버리면 된다. 노조뿐 아니라 국가차원에서도 서유럽의 부자 나라들은 이제 동유럽 가난한 나라들과 노동법계를 갖고 경쟁해야 한다. 최근 EU에 가입한 폴란드 헝가리 등 10개 동유럽국가들의 노동시장 유연성은 서유럽 기업인들의 눈으로 볼 때는 가히 경의적인 수준이다. 동유럽 국가의 생산성 향상률은 서유럽부자 국가들의 거의 3배에 달한다(1.5% 대 4.4%).서유럽의 기업들이 동유럽으로 공장을 이전하고 싶은 강력한 유혹을 받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해 서유럽의 노조들은 대폭적인 양보와 함께 발빠르게 변신하고 있다. 어떤 노조들은 아예 더 이상 '노조'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회사같이 이름을 짓고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의 통합 엔지니어 노조는 '노조'라는 이름 대신 '아미쿠스'라고 쓰고 있다. 어떤 노조들은 아예 시민단체같은 형식으로 운동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 이같은 변화와 함께 유럽에선 지금 새로운 희망이 싹트고 있다. '자본주의 산실'이라는 유럽이 찬란한 전통과 높은 기술 수준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에 뒤지고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노동시장의 경직성 때문이었다. 서유럽 노동시장이 유연해지면서 EU는 3억 인구,GDP 10조달러라는 광활한 시장을 가진 세계 최대의 경제 단위로서 새로운 도약의 가능성을 갖게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강성 노조운동의 메카인 서유럽이 이런 상황이라면 다른 나라는 말할 필요도 없다. 더 이상 노조가 민중의 복지를 내세우며 특권층으로 군림하는 것은 어느 나라도 용인할 형편이 못된다. 우리 노조도 이제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할 때다. 산업화의 일등 공신이었던 우리 노조가 세계화 파고에 힘겹게 맞서고 있는 우리 경제를 위해 이제 새로운 방법으로 기여할 때가 됐다. '산업화의 공신'이 이제 '세계화의 공신'으로 새로운 역할을 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