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한강로 1가 삼각지에 있는 '열린화랑'의 김수영 사장(56). 미술교사 출신인 그는 그림사업에 뛰어들어 지난 4년동안 지옥과 천당을 넘나들었다.


저가 그림액자 만드는 사업에 실패했던 그는 정수기 외판원등으로 1년간 전전하다 그림사업으로 돌아와 이제 고가 그림 판매업으로 재기하고 있다.


"많은 모임에 회원으로 들어가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했지요. 문화사업의 핵심은 친교입니다. 일반 상품처럼 영업이 관건이 아니란 얘기죠."


아직 절반의 성공이라며 겸연쩍어 하는 그는 실패를 체험하면서 달라진게 있다면 마인드 변화라고 했다.


'꾀''깡''끈'이 사업의 필수요소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준비없는 창업


김 사장이 새로운 사업을 꿈꾼 것은 지난 2000년.평생을 학교와 학원에서만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그는 '사나이답게 화끈한' 사업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2000년 말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다.


자신의 전공을 살려 소규모 그림액자 사업을 하기로 하고 경기도 김포의 허름한 농촌 창고를 빌려 공장을 만들었다.


직원은 4명.하지만 사업을 시작하고 보니 부닥치는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화장실이나 복도에 거는 1호짜리 소품용 그림이 주력 상품이었는데 5천원짜리 한개를 팔면 1천원이 이익으로 남았다.


마진율은 20%였지만 1천만원을 벌려면 무려 1만개를 팔아야 했다.


모텔이나 사무실에서 사가는 물량은 30개가 고작.1만개를 팔려면 3백군데 이상 거래처를 터야 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영업해도 실적은 시원찮았다.


더구나 중국에서 만든 제품들이 개당 2천원에 깔리기 시작하면서 가격경쟁에서 밀렸다.


"경험 부족으로 아무런 담보 없이 친구에게 1억원어치를 납품했다가 떼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로 더 이상 공장을 끌고갈 힘을 잃었지요." 3년간 버티던 액자사업은 마침내 2003년 7월 종을 쳤다.


가슴은 숯검댕이 됐고 빚 1억4천만원이 실패의 대가로 고스란히 남았다.


◆50대의 인생유전


나이든 전직 교사를 불러주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으로서 생활비는 벌어야 했다.


다시 들어간 첫 회사는 정수기 판매 업체.영세한 다단계 회사 간부는 입에 침을 튀겼다.


"잘만 팔면 한 달에 1천만원은 너끈합니다." 하지만 문전박대를 받으며 발이 닳도록 뛰어 다녔지만 한 달 동안 정수기는 한대로 팔리지 않았다.


다음은 건강보조식품 외판원.모 건강식품 판매회사에 두 달간 다니면서 그의 친인척들은 모조리 건강보조식품을 먹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떨어진 수입은 아르바이트생 시간급도 안되는 용돈 몇 푼.전철 행상으로 변신한 것은 수입이 괜찮다는 소문을 들은 뒤였다.


실제로 하루 수입이 20만원 이상인 데다 마진도 40%가 넘었다.


어려우나마 생활비는 벌 수 있었다.


전철 행상에 익숙해질 무렵 어느날.


"잠시 실례합니다.


이 소형 라디오는 등산 중에도 잘 들리고 공부하면서 전철 안에서 음악을 듣는 데 필수적이며 또 값이 가장 저렴합니다." 한참 상품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한 학생이 조용히 다가왔다.


"저…,선생님.미술 가르치신 김수영 선생님 맞지요?" "그…그래,오랜만이다.


다음에 보자."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산다


2004년 김 사장은 장고에 빠졌다.


"무얼 할 것인가." 결국 자신의 전공을 살려 삼각지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자금이 문제였다.


그는 아내를 설득,아파트를 전세로 주고 월셋집으로 옮겼다.


친동생에게도 돈을 빌려 모두 8천1백50만원을 마련했다.


2004년 5월25일 삼각지에 '열린화랑' 문을 열었다.


4년 전과 같은 그림 판매업이었지만 5배 넓은 점포였다.


사업 방식도 완전히 바꿨다.


예전처럼 박리다매식 소규모 액자 사업이 아니라 고가의 그림 상품과 조각품만 취급한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러면 일반인 대상의 영업은 소용이 없었다.


귀족 마케팅이 최선이었다.


그는 문화예술계의 많은 모임들을 찾아다니며 회원으로 가입했다.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의 모임'에는 빠짐없이 얼굴을 내밀었다.


상류사회에 상품을 팔기 위해서는 '장사꾼'으로는 곤란했다.


미술교사 출신으로 미술에 관한 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그는 스스로 상류사회의 멤버로 변신해갔다.


"지난번 사업이 단순히 액자만을 파는 장사였다면 지금은 문화를 파는 사업이지요.


미술품은 정가가 없다는 게 특징입니다.


공산품과 달리 같은 게 없으니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합의하면 그것이 곧 가격입니다." 알고 지내온 가난한 화가들은 조건 없이 그에게 작품을 맡겼다.


공급 물량은 무궁무진한 셈.김 사장은 인적 네크워크 외에 안정적인 판로를 만들기 위해 미술품 판매 전문가 두 사람과 인센티브 계약을 맺었다.


전시회 등 각종 이벤트를 열어 작품을 파는 게 이들의 주 업무.


2004년 7월 경남 창원에서 연 미술전시회는 대박을 터뜨렸다.


1백호짜리 대작 다섯점과 소품 54점이 전부 팔린 것이다.


전시 14일 만에 매출 6천만원,순익 2천4백만원을 기록했다.


이익금 일부를 창원시에 기부하기도 했다.


돈도 벌고 좋은 일도 한 '유쾌한 대박'이었다.


"최근에는 큰 빌딩 정문 앞의 예술품 구조물이나 대형 벽화 주문을 따내는 데 주력해 많은 성과를 내고 있고요,교회 예식장 등에서도 주문이 몰리고 있습니다.


반년이 채 안된 외판원과 전철 행상 생활이 이렇게 사람을 바꿔놓을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강창동 유통전문기자 cd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