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겸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75)는 나이가 들면서 '용서'에 관해 집요한 관심을 보여왔다.


그가 연출한 '용서받지 못한 자'(1993)와 '미스틱 리버'(2004)의 주인공들은 죄책감을 안고 살지만 타인들로부터는 기꺼이 용서받는 인물들이었다.


이스트우드의 25번째 연출작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주인공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도 마찬가지다.


가장 아끼는 사람들에게 무거운 죄의식을 지닌 채 평생 살아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프랭키를 은인으로 여긴다.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권투를 인연으로 만난 세 사람을 통해 사랑보다 진한 우정,또 가족애보다 뜨거운 인간애를 성찰한 걸작이다.


고전적인 연출 방식으로 감정의 심연을 탐색해 뭉클한 감동을 길어 올린다.


이 영화는 권투 선수로는 환갑의 나이인 30대에 권투를 시작한 여성 복서 매기(힐러리 스웽크)와 그녀를 제자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늙은 트레이너 프랭키가 만나 기회를 창조하고 목표에 접근해 가는 이야기다.


두 사람을 맺어주고 곁에서 지켜보는 권투선수 출신 체육관장 스크랩(모건 프리먼)의 내레이션에는 인생을 관조하는 시선이 담겨 있다.


성취보다 소중한 도전,인간을 위해 신을 배반해야 하는 숙명,생의 근원적인 아픔이 작품 전편에 잘 녹아들어 있다.


잔재주를 피우지 않고 등장 인물에 몰입하도록 이끄는 연출력 덕분이다.


스크랩과 매기의 대화 장면이 일례다.


스크랩은 권투시합 도중 과다 출혈로 한 선수가 실명할 당시 지혈사였던 프랭키가 선수로 하여금 그 경기를 포기하게 만들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안고 산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듣는 매기는 완벽한 몰입 상태에서 오감이 정지된 듯 미동도 하지 않는다.


만약 매기가 약간의 끄덕임이라도 표현했더라면 낮은 차원의 연기에 머무르고 말았을 것이다.


절제된 연기는 프랭키가 비극적 상황에 빠졌을 때 눈물을 글썽이지 않는 장면에서도 발견된다.


세 사람이 체육관 내에서 번갈아 대화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프랭키가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 강한 콘트라스트 조명을 통해 비장감이 고조된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후미의 사람은 거의 식별하기 어려울 만큼 어둡게 처리해 관객들이 대사에 더욱 몰입하도록 이끈다.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허름한 가게에서 우연찮게 발견한 보석 같은 물건'이라는 뜻이다.


10일 개봉,12세 이상.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