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온통 갈색, 또 갈색이다. 1막에서 4막까지 이 색조는 전혀 달라지지 않고 지루할 정도의 통일성을 유지한다. 주인공의죽음을 암시하는 창백한 푸른빛도, 젊음의 활기를 상징하는 싱싱한 초록빛도 없다. 천장과 벽의 얼룩들, 난로 가에 널어놓은 빨래, 작은 소품들에 이르기까지 암시와 상징을 배제하고 사실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 무대는 전통적인 연출 방식에가치를 두는 영국 로열 오페라하우스의 1974년 연출작. 그 뒤로 30년이 넘도록 맥을 유지하다가 마침내 예술의전당 시즌 기획공연으로한국 관객을 찾아왔다(3일-12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 오페라 '라보엠'의 원작소설인 앙리 뮈르제의 '보헤미언 삶의 풍경'이 19세기 파리의 낡고 누추한 건물에 세들어 사는 가난하고 젊은 예술가들을 주인공으로 삼은작품인 만큼, 눈을 침침하게 만들 정도로 어둑한 이 무대는 원작의 배경에 최대한접근하려는 시도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상연되는 오페라인 데다 국내에서도 해마다 오페라 레퍼토리에서 빠지지 않는 작품이어서 한번쯤 참신하고 파격적인 무대를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이 해묵은 고전적 연출에 실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오페라를 처음 접하는 관객에게는 교과서적 무대가 '라보엠'을 제대로'배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홍혜경의 미미를 만난다는 기대도 컸지만 오페라 팬들에게는 테너 리처드 리치(Richard Leech)가 연기하는 로돌포도 큰 관심사였다. 그동안 오페라 음반과 해외 무대에서 서정적인 미성과 드라마틱한 에너지를 함께맛보게 해준 리치는 역시 이번 무대에서도 거의 완벽한 가창과 연기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아리아 '그대의 찬 손' 가사에 나오듯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백만장자"인젊은 시인 특유의 혈기방자함과 만용이 약간은 부족해 아쉬웠다. 로열 오페라 판 '라보엠'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가 바로 이 '이탈리아적 분방함의 결여'라고 할 수 있다. 이날 공연에서 84세의 고령으로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노장 줄리어스 루델은 평생 오페라에 헌신한 그의 명성에 걸맞도록 정교하고 격조있게 푸치니를해석했다. 끝없이 솟구치고 가라앉으며 파도치는 푸치니의 풍부한 선율을 지나치게센티멘털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엄격한 틀에 담아 넣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관객은 감정을 폭발시키기에는 음악적 자극이 아주 조금 부족한 듯한 아쉬움을 느껴야 했다. 과장과 분방함을 곧장 천박함과 연결시키는 영국 오페라의 전통이 이런 결과물을 낳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연출 의도는 무대미술과 의상 디자인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2막의 크리스마스 이브 거리 풍경과 카페 '모뮈스' 장면 역시 크리스마스의 화려하고 들뜬 분위기, 여기서 처음 등장하는 무제타의 관능미를 압도적으로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무제타의 왈츠'는 청순가련형의 미미와는 대조적으로 대담하고 유혹적인 무제타를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인상적인 장면이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지나치게 희극적으로 표현되어 그 매력이 다소 줄어든 감이 있다. 폐병과 천식으로 고생하는 여주인공 미미가 끔찍한 가난 때문에 애인 로돌포와헤어졌다가 결국 그에게 돌아와 숨을 거두는 장면, 로돌포가 미미를 처절하게 외쳐부르는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라보엠'은 실패작이다. 음악적 감동이 없었거나 연기와 무대가 어색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홍혜경의 미미는 공연을 성공으로 마무리하는 원동력이었다. 가슴 을 저리게 하는 가창의 표현력은 둘째치더라도, 4막에서 리치를 포옹하며 그의 품에매달리는 홍혜경의 절절한 연기는 관객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전율을 느끼게 했다. 더구나 그 원숙한 표정 연기는 정말 놓치기 아깝다. 오페라 글래스가 꼭 필요한공연이다. 한 가지 더. 지루할 만큼 일관성 있는 갈색 톤의 무대와 조명은 로돌포와 미미둘만 남아 첫 만남을 회상하는 4막 장면에서 마침내 그 의미를 깨닫게 한다. 마치 빛 바랜 50년대 흑백 사진처럼 보이는 무대와 두 사람의 모습이 환상적인아름다움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서울=연합뉴스) 이용숙 객원기자 rosina@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