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금융시장은 철저히 돈의 논리가 좌우한다는 점에서 포커판과 닮았다. 포커에서 이기려면 상대 패를 읽는 것 못지 않게 자신의 패를 읽히지 않는 게 중요하다. 포커게임 관점에서 볼 때 지난달 22일 세계 달러값을 뒤흔든 '한국은행 쇼크'는 기이한 일이다. 한은 스스로 자신의 패(투자전략)를 드러내 보인 셈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하루새 원화로 살 수 있는 달러값은 17원이나 급락,달러당 1천원선도 위태롭게 됐다. 가뜩이나 환율이 떨어져 걱정인데 한은은 왜 공식문서(국회 업무보고서)에 '투자대상 통화 다변화'를 명시했을까. 대략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 한은이 2천억달러를 굴리는 메이저 플레이어임을 잠시 잊었거나,재정경제부의 한국투자공사(KIC)법 입법 에 맞서 대응논리를 펴는 데 올인했거나.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한국관련 최대 뉴스라던 '한은 쇼크'는 채 이틀을 못갔다. 노련한 국제 외환딜러라면 일본 중국 대만 한국 등 외환보유 1∼4위 국가가 달러값을 폭락시킬 만큼 보유 달러를 내다팔 수 없다는 사정을 잘 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외환보유액이라 부르는 것이 지닌 복잡한 함의가 느껴진다. 외환위기 땐 '텅빈 나라곳간'과 동의어였다. 이후 수출과 외자유치로 막대한 달러가 유입돼 차곡차곡 쌓이자 '국부''국가신인도'로도 인식됐다. 하지만 지금은 냉정히 말해 미국 '쌍둥이 적자'(경상·재정적자)와 동전의 앞뒷면이 됐다. 국내로 좁혀보면 거시적(국가) 유동성 위기 해소가 미시적 유동성 위기(가계빚·신용불량 사태)로 치환됐다고도 볼 수 있다. 한·중·일·대만 4개국 외환보유액은 1조8천억달러,아시아 전체로는 2조4천억달러(세계의 70%)에 이른다. 지난해 1조달러를 넘어선 미국의 쌍둥이 적자는 주로 아시아 국가들이 메워줬다. 각국이 애써 만든 상품을 미국에 수출해 번 돈으로 쥐꼬리 이자를 주는 미국 정부 발행 '종이쪼가리'를 사서,달러값을 떠받치는 게 작금의 세계 금융흐름의 큰 줄기(2기 브레튼우즈체제)다.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지난 2일 의회에서 '한은 쇼크'에 대해 "외환보유액 구성의 미세한 조정 이상 의미가 있다는 증거는 없다"고 말했다. 그린스펀조차 아시아 중앙은행들 눈치를 본다는 분석도 나왔지만 오히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 질서의 근간은 여전히 튼튼하다는 뉘앙스로 들린다. 미국의 '약한 달러' 정책은 채무부담 감소를 의미한다. 동시에 미국이 비교우위를 지닌 고유가,원자재 투기를 유발하고 있다. 어떤 나라든 미국과 축구같은 운동경기로는 '국가 대 국가'로 맞짱뜰 수 있어도,국제금융시장에선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적어도 돈에 관한 한 '무턱댄 친미'도,'턱없는 반미'도 안된다. 2천억달러를 웃도는 국내 외환보유액 투자대상은 이미 다변화돼 있다. 하반기부턴 KIC가 2백억달러를 떼내 따로 굴린다. 한은은 최근 3년간 꾸준히 달러자산 비중을 줄여 지금은 대략 60%대로 낮춰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은이 투자대상 다변화를 언급한 것도 '미래형'이라기보다 '현재완료형'에 가깝다. 외환보유액 과다 문제는 충분히 논의할 필요가 있지만 외환보유액을 어디에 투자하는지,수익률은 얼마인지에 대한 '알 권리'는 국익 차원에서 잠시 접어둘 필요가 있다. 국회가 운용내역을 알고 싶어할수록 수익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국제금융시장이란 포커판에 뛰어든 한은에 자꾸 패를 보여달라고 해선 곤란하다. 물론 있으면서도 없는 척 블러핑 정도는 할 수준이 돼야겠지만. 오형규 경제부 차장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