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孝鍾 < 서울대 교수 > 투명한 것은 좋은 것일까. 개인적으로 보면 투명한 것은 그다지 좋은 게 아니다. 개인이라면,당연히 비밀스러운 것도 있어야 하고 가슴에 묻어두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남한테 들은 이야기를 죄다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은 '헤픈 사람'이고 신용이 없는 사람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무덤까지 가지고 가는 비밀도 있어야 한다. 또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감정은 물론,싫어하는 사람에 대한 감정도 숨길 줄 알아야 한다. 미운 사람일수록 떡도 하나 얹어주고 귀여운 자식일수록 매도 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귀여운 자식을 때리면서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는 부모나 눈물을 흘리면서 마속의 목을 벤 제갈공명이나 투명성의 잣대로는 잴 수 없다. 그러나 공적영역은 다르다. 직책상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의 상호관계에서는 투명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투명성이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 누구에게도 부끄러움 없이 보여줄 수 있는 상태다. 수술하는 의사가 마약을 먹고 환자를 수술했다는 사실이 알려질 것을 미리 알았다면, 과연 마약을 먹었을까. 또 학생의 답안을 대신 써준 교사나 아들을 위해 답안을 유출한 교수도 그것이 언젠가 만인 앞에 공개되리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시험부정을 저지르지 못했을 것이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다. 돈을 몰래 주고 받다가 들통이나 망신을 당하고 '벌거벗은 임금님'이 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불투명의 전통을 갖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한국의 투명성은 왕조실록을 보존했을 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당대의 왕도 보지 못할 정도로 사관들은 보고들은 것을 투명하게 빠짐없이 기록했다.그토록 투명했기 때문에 지금도 조선왕조가 어떤 방식으로 운영돼 왔는지 거울에 비춰보는 것처럼,속속들이 알 수 있다. 이쯤 되면 우리 정치문화는 투명한 문화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어찌된 일인지 문서기록이 부실해 광복 60년동안 대통령이나 주요 공직자들이 무슨 일을 어떤 식으로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투명성 지수도 세계에서 40위권이다. 투명성이 소중한 이유는 공정성과 불편부당성의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의 공정성을 가늠하기 위해선 그 일이 투명하게 이뤄졌는가를 점검해보면 알 수 있다.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밤의 문화'를 좋아했고 또 "역사는 밤에 이뤄진다"는 속설을 믿어왔다. 또 '낮의 대통령'과 '밤의 대통령'은 다르다고들 하지 않는가. 막상 "밤에 이뤄지는 역사"에 매달린 결과 부정부패의 관행화를 막을 길이 없었다. 뇌물을 주는 것도 밤이고 뇌물을 받는 것도 밤이기 때문이다. 부정한 인사청탁도, 승진과 취직부탁도 모두 밤이다. 아마 수능의 휴대폰 부정모의도 밤에 이뤄졌을 것이다. 대낮에, 햇빛이 비치고 있는 상황에서 불의를 모의할 만큼 '강심장'을 갖고 있는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이처럼 '백년하청'의 '밤문화'에 젖어 있다 보니 뇌물을 주고받는 것도 인정을 주고받는 것으로 착각하고, 또 촌지를 주고받는 것도 감사의 정을 주고받는 것으로 치부해 왔다. 엊그제 이런 '생뚱맞은' 일들을 없애자고 각계를 대표한 주요 인사들이 '투명사회협약'을 맺었다. 뜻깊은 일이다. 그러나 협약은 '약속어음'과 같은 것이어서 맺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키는 게 중요하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닌 것처럼, 한국사회가 하루아침에 투명사회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2% 투명성이 부족한 사회가 아니라 98% 투명성이 부족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어두운데 있다가 햇빛을 보면 눈이 부시다. 그래도 밖으로 나와 햇빛을 보아야 한다. 플라톤은 '동굴의 우화'에서 태양을 못보고 어둠 속에서 그림자만 보고 살아가는 삶을 자조한 바 있는데, 어두운 불투명 사회에 살아온 우리가 그러한 운명이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햇빛이 따가워도 밝고 환한 세계로 나와야 한다. 바로 그것이 '투명사회협약'의 메시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