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바'의 이효복 사장(37)은 맥주점 프랜차이즈 업계에서 고급 이미지 전략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구축했다.


인테리어사업에서 실패했으나 이에 대한 노하우를 활용해 고급스런 매장 분위기를 연출,현재 국내에 1백65개,중국에 5개의 가맹점을 확보하고 있다.


그는 너무 일찍 사업에 뛰어들어 쓴맛도 많이 봤다.


전공이 아닌 인테리어 사업을 벌이다가 한때 집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인테리어 솜씨 덕분에 다시 일어서 주위에서는 '오뚜기 인생'으로 불리고 있다.


"지난 10년간의 사업과정은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실감하는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오죽하면 앞으로의 사업목표를 '절대 망하지 않기'라고 잡았겠습니까."


◆남대문시장 옷가게 점원으로 시작


이 사장의 집안은 원래 유복했다.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충남 온양에서 양조장을 운영했던 거부였다.


아버지도 명문 S대를 졸업하고 여러가지 사업에 손댔다.


이 사장은 지금껏 월급쟁이 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


자유분방한 사업가의 피를 물려받은 것이다.


그의 사업인생 출발은 남대문시장.군대를 마치고 복학하기 전 3개월 동안 남대문시장 의류상가 점원으로 일했다.


새벽 1시 집을 나서 2시에 시장에 도착하면 상가는 불야성을 이뤘다.


남들이 잠자는 시간,남대문시장엔 오히려 활기가 넘쳤다.


그는 거기서 장사의 역동성을 배웠다.


"처음으로 사업한 게 생수 장사입니다.


의류상가 종사자들이 하나같이 기관지가 나쁜 거예요.


하루종일 섬유 먼지를 마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1백50원짜리 병생수를 얼려서 5백원 받았는데 장사가 짭짤했어요."


◆다양한 장사를 섭렵


졸업 후 본격적으로 장사에 나선 그는 93년 서울 정릉에 책 대여점을 냈다.


1천4백만원을 투자,한 달에 2백만원씩 벌었다.


책 대여점을 접었을 때 초기 투자금 1천4백만원은 4천3백만원으로 불어났다.


두 번째 사업 아이템은 포켓볼장.모은 자금 4천3백만원을 모두 투자,돈암동 성신여대 앞 A급 상권에 가게를 냈다.


한 달에 1천만원 이상 들어왔다.


사업을 확장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내친 김에 노래방과 비디오방도 냈어요.


이때가 94년부터 96년까지 3년간이었는데 대학가 상권이라 장사도 잘 됐고요,아이템이 모두 관리가 편한 것들이어서 순탄하게 굴러갔지요.


3년간 2억원 정도 모은 것 같아요."


이 사장의 특기인 인테리어가 본격적인 사업으로 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


인근 가게 주인들이 소문을 듣고 그에게 인테리어를 맡긴 것이다.


전문 인테리어 업자보다 비용이 적게 들면서도 훨씬 꼼꼼하게 일을 잘한다는 평을 들었기 때문.


◆천당에서 지옥으로 전락


벌어놓은 2억원을 당시 뜨기 시작한 웨스턴 바에 올인했다.


이것이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줄 이 사장은 꿈에도 몰랐다.


야심작 '락앤롤'은 홀 중앙에 자리잡은 바텐더의 묘기로 손님을 불러모으는 웨스턴 바 스타일의 주점이었다.


문제는 공급이 절대 부족한 바텐더가 3개월 주기로 일터를 옮긴다는 것.3개월 이상 보여줄 묘기가 없고 다른 웨스턴 바에서 끊임없이 바텐더를 유혹하는 까닭에 한 가게에 오래 근무할 수 없었다.


'락앤롤'은 결국 98년 초 큰 손해를 보고 단돈 5천만원에 팔았다.


98년 상반기 자영업 시장은 얼어붙었다.


이 와중에도 유일하게 손님을 모은 것은 '콜라텍'.서울 연신내에서 콜라텍을 오픈해놓고 전국 6곳의 콜라텍 인테리어 공사를 수주했다.


"콜라텍의 인기는 6개월을 넘기지 못했어요.


전국 6곳에서 공사를 마쳤는데 공사대금 9억원 중 4억원을 못받았지요.


부품 공급업체에선 돈 달라고 아우성이고,직원 9명은 월급이 안나오니까 다 떠나버렸습니다."


고양시 화정에 있던 아파트를 팔아 급한 불을 껐다.


아내와 아들은 처가로 보냈다.


제조업을 하던 친형도 외환위기 탓에 부도를 맞았다.


집안이 졸지에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98년 여름 인테리어 공사 관계로 부산에서 여관에 머물 때였죠.가진 자금과 직원이 다 떨어져 나간 마당에 공사를 더 진행할 수도 없었어요.


주머니에 달랑 2만원이 남더라고요.


자살을 결심하고 새벽에 무작정 바다로 향했어요.


그런데 바닷가 동네의 조그만 교회 마당에 이런 문구가 걸려 있더라고요.


'무엇을 염려하십니까,기도할 수 있는데….' 그때 망치로 맞은 듯 머리에 큰 충격이 왔지요." 그는 이후 기독교인이 됐다.


◆재기의 발판이 된 맥주점


98년 9월 신용보증기금으로부터 대출받은 생계형 창업자금 5천만원은 재기의 밀알이 됐다.


이 돈으로 인테리어 사업에 다시 나섰다.


첫 공사는 서울 마포의 한 칼국수집.맥주점으로 완전히 바꾸고 이름을 '텍사스'로 붙여줬다.


단순한 인테리어 업자가 아니라 가게 이름,메뉴 개발,경영지도까지 창업컨설턴트 역할을 한 것이다.


칼국수집에서 맥주집으로 바꿔 대박이 터진 가게 주인은 친지 7명을 고객으로 모아주었다.


99년에는 텍사스 맥주점 인테리어 공사가 무려 16건이 몰렸다.


1억원이 넘는 공사대금 중 마진은 20% 정도.남은 빚을 말끔히 청산했다.


2000년 와바를 상표등록하고 2001년 1월 서울 신문로에 1호점이 생겼다.


독특한 인테리어와 세계 각국 맥주를 취급하는 와바는 생기는 곳마다 해당 상권에서 '빅 히트'를 쳤다.


최근에는 상하이 선전 칭다오 등 중국 도시지역에 5개 가맹점이 문을 열었다.


"빚 독촉을 참아준 협력업체와 마포 칼국수집 주인 같은 고마운 분들이 없었다면 저는 다시 일어설 수 없었을 겁니다.


특히 2년간 생이별을 했던 아내와 아들은 제 삶을 지탱해준 생명의 끈이었다고 봐야죠."


강창동 유통전문기자 cd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