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한 민간경제연구소 상무로 근무하는 K씨.


지난 1월 '쓸 만한 경제·경영학 박사를 스카우트해 오라'는 소장의 특명을 받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가 깜짝 놀랐다.


자신과 똑같은 목적을 가진 국내 국책·민간 경제연구소 관계자들이 단합대회라도 하듯 자리를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산업연구원(KIET) 등 국책 연구원은 물론 삼성 LG SK 등 국내 내로라하는 민간경제연구소 관계자들이 총출동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국사회과학협회(ASSA) 학술대회에서 한국 출신 경제·경영학 박사들과 채용 인터뷰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최근 해외파 경제·경영학 박사들이 줄면서 국내 경제연구소는 물론 대학들까지 인재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사 실업자'들이 넘쳐났지만 상황이 급반전 한 것.


외환위기 이후 해외 유학생이 급감한 데다 미국 유명대학들의 외국학생 쿼터 배정에서 한국 몫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ASSA 학술대회 때 미국을 다녀온 김기환 KIET 연구조정실장은 "이제는 쓸 만한 인재는 수요자들이 직접 찾아가서 모셔와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학술진흥재단에 신고된 해외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자 수는 △1994년 3백29명 △1995년 1백22명 △1996년 1백34명 등으로 꾸준히 세자릿수를 넘었으나 외환위기 직후부터는 △1999년 88명 △2000년 58명 △2001년 67명 등으로 두자릿수에 머물고 있다.


해외 경영학 박사학위 취득자 수도 94년 2백86명을 정점으로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다.


이처럼 해외파 경제.경영학 박사들의 숫자가 부쩍 줄고 있는 것은 외환위기 영향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따고 지난해 KDI로 온 조성훈 연구위원은 "박사학위 취득에 걸리는 시간을 고려할 때 지금 한국에 들어오는 이들은 외환위기 직후 유학을 간 사람들인데,당시에 환율이 너무 높아 해외 유학을 포기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미국 주요 대학에서 한국인 유학생들을 과거보다 잘 받지 않는 것도 한 몫 했다는 분석이다.


신현한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전략적으로 개도국별로 유학생 쿼터를 안배하고 있는 미국 주요 대학들이 최근 들어 한국 비중을 낮추고 경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중국과 동유럽 출신 학생들을 대거 받아들이는 추세"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하버드 MIT 프린스턴 시카고 등 미국내 '톱10' 대학의 박사학위 취득자가 급격하게 감소,인재난을 더욱 심화시키면서 연구소는 물론 대학들도 인재 확보에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또 유명 주립대학들도 최근 긴축재정에 들어가면서 외국 유학생들에게 일정한 장학금이 보장되는 박사과정 정원을 대폭 축소,고급인력난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장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톱5나 톱10 대학 박사과정에 유학가는 제자가 매년 5명은 넘었는데 3년전부터는 한두 명으로 확 줄었다"며 "괜찮은 교수 모시기가 무척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연세대 신 교수는 "우수 인재들이 MBA(경영학석사)만 마친 뒤 대학보다 훨씬 높은 급여가 보장되는 기업으로 직행하고 있어 교수요원 확보난을 부채질하고 있다"며 "앞으로 10년 정도는 교수 인력이 모자랄 것 같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박사실업'이란 말은 적어도 경제.경영학 전공자들에게는 옛말이 됐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달리다 보니 몇 군데 중 맘에 드는 곳을 골라갈 수 있게 됐다는 것.


KDI 조 연구위원만 해도 지난해 두세 군데 연구소로부터 동시에 채용 통보를 받고 '행복한' 고민을 했다고 한다.


경영학의 경우는 해외 박사 품귀로 인해 국내파 박사라도 뚜렷한 연구 실적만 있으면 지방대학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서울 소재 대학의 교수가 되는 경우도 빈번해졌다.


김동윤 기자 oasis93@hankyung.com